위정(爲政) 11章 -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잊지 않고 새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 溫: 따뜻할 온, 익힐 온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해설]
☞ 온고지신(溫故知新) vs.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것. 옛 학문을 연구하여 기본으로 삼고, 현재를 궁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지만 그 속 뜻을 깊이있게 음미해보자.
주석(注)에 보면 '온(溫)'을 '심역(尋譯)'이라 했는데, '심(尋)'은 '찾는다'는 의미이고 '역(譯)'은 '연역(演繹: 추론)'이라는 의미이다. 즉, '온고(溫故)'는 그냥 단순히 주어진 것만 소극적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서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옛 것(故)이라 함은 '구소문(舊所聞)'이라 하여 예전에 들은 것이고, 새 것(新)이라 함은 '금소득(今所得)'이라 하여 새로 터득한 것을 말한다.
논어 첫 장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온고(溫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옛 고전을 익히는 것은 오늘날 인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물론 단순히 옛 것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남에게 가르침을 펼치는 수준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고 오늘날의 학문이나 자기전공을 심도있게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문학 공부의 이유이기도 하리라.
'온고이지신'과 유사한 뜻으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는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의미로, 원래는 옛 것을 모범으로 삼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원본은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초정집서(楚亭集序)》라는 책에서 유래한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라도 그 존재가 한시적이 아니라면 구성원들은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자연스럽게 구분되어진다. 그리하여 두 세대간 끊임없는 갈등과 타협에 의해 조직은 유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로 고참으로 칭해지는 선배들로 이루어진 구세대와 신참으로 칭해지는 후배들로 이루어진 신세대의 조화가 관건인 것이다. 바로 그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말이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아닐까 한다. 구세대의 전통을 익히고 신세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구성원간의 관계형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직의 전통과 규칙을 따르되 새로운 변화를 알고 조직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새로운 것을 창출하되 전통이나 규칙에 위배되지 않게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도 일맥상통한다.
고참이자 선배의 대표격인 리더는 조직의 전통과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는 수용해주는 리더십(leadership)을 발휘하고 신참이자 후배격인 조직원들은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면서도 조직의 전통과 기준을 지켜나가는 팔로워십(followership)을 발휘한다면 그 조직은 조화롭게 발전해 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정(爲政) 12章 - 군자불기(君子不器)
子曰: 君子不器.(자왈: 군자불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accomplished scholar is not a utensil."
*utensil: (가정에서 사용하는) 도구/기구
[해설]
☞ 무한정한 쓰임새 있는 내면의 그릇을 키우자.
그릇(器)이라 함은 각각 그 용도에만 적합하게 만들어진 도구이므로 다양하게 통용될 수 없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표현된다. 밥을 담는 밥그릇, 국을 담는 국그릇, 찬을 담는 찬그릇,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 등등.. 그릇을 만들 때는 그 목적에 맞게 만들게 마련이다. 즉 그 쓰임(用)에 따라 모양(體)이 정해지거나 그 모양체에 따라 그 쓰임의 용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그릇(器)이 일정한 모양(體)을 갖추어 한정적인 재주와 기예(技藝)를 지니지만, 덕(德)을 쌓은 군자는 그 그릇이 일정하지 않아 재주와 기예가 한정적이지 않다. 군자는 단순한 도구인 그릇의 수준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 쓰임도 한가지 용도로써가 아니라 무한정(無限定)의 용도로 쓰이게 된다.
세상에는 평범하게 딱 자기 그릇만큼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그릇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역량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 흔히들 그릇의 크기에 비유하는 이유인데 특히 요즘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비유가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그러한 그릇의 크기에 따른 능력을 담보한 각개 역량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대단히 큰 무엇을 담을 수 있는 표면적인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어떠한 것도 포용할 수 있는 내면의 그릇 크기의 무한함으로 인하여 그 마음 씀씀이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자기분야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작업은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그 박수에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에 대한 찬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작업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극복하기 힘든 육체적 차이에 따른 것일 수도 있기에 아무나 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내면의 성숙을 통한 쓰임새가 무한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물론 마찬가지로 뼈를 깍는 고통보다 더한 마음의 수양이 필요한 것도 분명하기 때문에 그 아무나가 정말 아무나는 아니겠지만, 누구라도 환경과 여건이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위정(爲政) 13章 - 선행기언이후종지(先行其言而後從之)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而後從之.(자공문군자. 자왈: 선행기언이후종지.)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그 말할 것을 실행하고, 그 후에 말이 행동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sze-kung asked what constituted the superior man.
The Master said, "He acts before he speaks, and afterwards speaks according to his actions."
*constitute: ~이 되다, superior man: 군자
[해설]
☞ 말보다 실행, 실천력을 갖추자.
군자(君子)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으로 유명한 말이다. 군자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실행에 옮기며 이미 실행한 뒤에 말을 하는 존재이다. 공자는 늘 '말보다 행동'을 강조하면서 실행이 따르지 않는 말을 가장 경계하였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자공이 질문하는 의도를 파악하여 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자공은 젊은 제자인데 말을 잘하는 소위 달변가(達辯家)였다. 그런 달변가로서의 자공의 고민이, 말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군자가 되려면 말보다는 실행을 더 중요시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말과 행동에 대해 전해내려 오는 우리의 격언에도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말과 행동은 천지(天地)에서 보고 듣고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말을 아껴야 하며, 호언(豪言)하고 실행치 않으면 죄(罪)가 된다."
요즘은 말로 인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현대의 정치판에서는 선거 때가 되면 말들이 난무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공약(公約)'이라고 내세우는 말들이 후에 빈 말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아왔다. 군자로서의 정치가 아닌 소인배로서의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을 무수히 봐 온 것이다.
조직에서 리더는 자기가 한 말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부하들이 따르지 않는다. 그 말은 실천하는 리더가 되면 남들도 잘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바람직한 리더상이란 실행력을 갖춘 리더를 말하는 것이리라.

위정(爲政) 14章 -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불주(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자왈: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불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하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catholic and not partisan.
The mean man is partisan and not catholic."
*catholic: 보편성,포용성, partizan: 편파적인,당파적인, mean: 비열한, 상스러운
[해설]
☞ 치우치지 말고 두루 사랑하라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본문에서 '주(周)'는 '공(公)'으로 '보편(普遍)'을 뜻하고, '비(比)'는 '사(私)'로 '편당(偏黨)'을 뜻한다. 즉, 군자는 보편적인 사랑을 하지만 소인은 치우친 사랑을 한다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군자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소인은 자기무리의 이익에만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편당을 가르지 않고 두루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한 무리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세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로부터는 정치판의 당파주의에서 직장과 사회에서의 파벌 및 이익집단, 아래로부터는 학교나 아이들의 패거리문화에서 마을공동체의 님비(NIMBY) 현상까지 주로 자신들만의 이익을 우선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소인배들의 전형적인 행태(行態)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한마디로 '편당(偏黨)이 넘쳐 나는 세상'으로 되어 버린 듯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편당은 군자와 대비되는 소인의 본래 모습과는 양상이 조금 다른 느낌이다. 고전에서의 군자와 소인의 행동을 보면 늘 서로 상반되는 양태를 보이는 듯 하지만, 사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폭과 정도만 다를 뿐 둘 다 사람을 친(親)하게 여기려는 의도는 같았다. 다만 군자는 그 의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이 가도록 공공(公)의 이익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반면, 소인은 사사로이 자기(私)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게 다르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그래도 인간성(人間性)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가치판단의 중심에 서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고전 속의 소인과 달리, 오늘날의 편당은 사람이 가치판단의 중심이 아닌 집단의 목표나 사상과 이념 등이 사람 그 자체보다 우선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전 속에서의 소인배의 행동으로 인한 것보다 더 위태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군자는 둘째치고 소인의 인간성 배려 수준에도 못 미치는 '비(非)인간적', '몰(沒)개성적' 행동이 판치는 진짜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옛날 편당이 더 나았던 게 아니냐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나올 만하다. 비유하긴 뭣하지만 마치 예전의 맨주먹만을 사용한 인간적인 결투와 요즘의 떼거리간 무시무시한 연장을 동원한 집단난투극 같은 차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이기적인 '인간적 편당'의 수준을 벗어나 다분히 기계적인 '맹목적 편당'으로 변질되고 있는 느낌으로, 점점 소인배보다도 더 못한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우려일까.
사실 편당은 자기자신이 당당하지 못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시키기 보다는 무리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이 결국 자신을 소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세상이 되려면 끼리끼리 모이는 편당을 짓지 말고 사람 중심의 두루 하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한 사회나 조직의 수준은 편당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위정(爲政) 15章 -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Learning without thought is labor lost; thought without learning is perilous."
* labor lost: 헛수고 (lose one's lost: 헛수고하다), perilous: 아주 위험한
[해설]
☞ 배우면 생각하고, 생각하며 일하라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과 같다. 생각하는 그 자체는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상태와 동일한 것이다. 즉,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데 필요한 전초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심(私心)이 없다'는 것처럼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인데, 마음속에서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그로 인해 얻어지는 것도 없게 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우는 시간만 낭비하고 얻는 것이 없어 헛수고가 된다. 즉, 자기 것으로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공부하는 자세를 일러주고 있는데, 그러한 태도에서의 생각은 자기만의 행위이므로 결국 공부는 순전히 자기자신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무엇을 배우면 생각하여 되새기고 정리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헛수고가 아니라 위태로워 진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반드시 해야 유익할 것이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거나 할 것인데, 어떻게 할 지에 대하여 배워 익힘이 없다면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되어 유익하지 않거나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으므로 위태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이는 생각없이 배우기만 하는 헛된 노력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이다. 공자(孔子)는 일관되게 '실행(實行)'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행동대원 같은 실행을 중시한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의 생각이 앞서는 실행을 중시하였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와 같이 배움에는 익히는 행위가 따라야 하는데, 익히는 행동에는 먼저 생각하는 단계가 전제로 깔려 있다. 배웠으니 어떻게 익혀야 할 지를 생각하는 전제인 것이다.
우리는 평소 '생각없이 일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처럼 완전 헛수고는 아닐지라도 자신에게 얻어지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면 생각하고, 생각하며 일하자' ※ 중국 송(宋)나라의 정자(程子)는 《중용(中庸)》 20章을 인용하여, 학문에 5가지가 있는데 '박학(博學: 넓은 학식)', '심문(審問: 상세한 질문)', '신사(愼思: 신중하고 깊은 생각)', '명변(明辨: 명확하게 말함)', '독행(篤行: 돈독한 행실)' 등으로 한가지라도 부족하면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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