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저항 수단인지에 대해 토론하다가 맨디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로웨이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어느 교도관한테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무시였죠.

나는 매일 갔고, 그때마다 무시당했어요.

그래도 인사를 건넸죠.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반항아가 따로 없네요." 자말이 말한다. 

맨디가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인사를 받아줬어요. 나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더라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죠. 난 너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인사만 하고 싶을 뿐이야."

우리 모두 웃는다.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무지 노력해야 했어요." 맨디가 말한다.

몇 주가 지나자 그녀도 인간이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어린 시절의 내가 형인 제이슨이 감옥에 갔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왠지 곤경에 처할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형이 나쁘니 나도 나쁘다고 지레짐작할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의심을 사지 않으려 노력했다.

브렌다의 조카가 그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고모와 연관돼 있다는 처벌 의식이 나보다 훨씬 심하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 형이 피부색이나 특이한 성 때문에 강제 출국될 위기에 처했더라면 내 피부색이나 성이라는 기본적 사실에 내게도 문제가 될까봐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다운뷰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브렌다가 말한다.

"그러다 10년 뒤 시를 가르치는 강사로 그것에 가게 됐죠. 워크숍이 끝나고 나서 교도소 측에서 교도소를 견학하게 내 옛날 감방도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어요. 너무 신이 났죠.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던 감방을, 내가 새 인생을 찾고 결국 수감자가 아닌 강사로 돌아오게 해준 감방을 빨리 보고 싶었어요."

브렌다가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뒤에 백인 여성 둘을 양옆에 끼고 교도소 마당을 걸어갔어요. 한 명은 내 제작자였고 또 한 명은 우리가 감방에 들어올 수 있게 예약해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거대한 백인 교도관이 나를 막아 세우면서 이러잖아요. "왜 네 감방으로 안 돌아갔어? 감방에 있어야지.'

'뭐라고 하셨죠.' 내가 말했죠.

'네 감방으로 돌아갔어야지.' 그가 말했어요.

나와 함께 있던 두 백인 여자가 나는 재소자가 아니라 시인이자 방문객이라고 설명했어요. 교도관의 얼굴이 시뻘게졌죠.

사과도 없이 얼굴만 벌게졌어요.

내가 그랬죠.

'아 제가 수감자인 줄 알았군요.

아니 아니에요.

그냥 여기 행사를 진행하러 온 사람이에요.'

교도소를 나오고 나서 내 제작자가 너무 화가 나서 나도 같이 화를 내기를 바라더군요.

하지만 흑인 여자에겐 그게 훨씬 복잡한 문제라는 점도 이해했어요.

그런 나를 보고 그녀가 슬퍼했지만 나는 '아니, 아니에요.

그냥 여기 행사를 진행하러 온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힘을 느꼈어요.

만약 화를 냈으면 그 분노를 집까지, 그리고 다음 날까지 계속 가져갔을 거예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 교도관은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라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그 대신 이렇게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어요.

'옛날엔 체제에 힘을 뺐겼지만 지금의 나를 보라'고."

 

pp.291~294.

 

 

머리 세어 돌아와 소나무 잔뜩 심고,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보고자 했지.

조물주 영역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버드나무 늘어저 낮은 집은 어둑하고, 붉은 앵두는 익을 대로 익어 계단 위로 떨어지는데,

언제나 물러나서 서원직과 더불어 양양의 방덕공을 방문할 수 있을까.

白首歸來種萬松, 待看千尺舞霜風,

年抛造物陶甄外, 春在先生杖屨中,

楊柳長齊低戶暗, 櫻桃爛熟滴階紅,

何時却與徐元直, 共訪襄陽龐德公.

- 소식(蘇軾), 「기제조경순장춘오(寄題刁景純藏春塢)」

 

해마다 봄이 오면 변함없이 진은영의 시를 읊는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푸른 계절의 머리를 밟고 서서, 고개 드는 봄꽃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옆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 불과하거든!"

누가 아니랬나. 짧은 생이 아쉬워 번식을 하고, 번식을 위해 애써 피었다 탄식하듯 지는 저 식물의 생식기들.

그 생식기의 깊은 그늘 아래, 봄의 속도를 묵상한다.

봄은 달콤한 것이라 빨리 지나간다.

일주일 중 주말에 해당한다. 눈 한번 깜박이면 월요일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예상치 못한 실연이나 죽음에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말한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내되 모든 것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출세와 업적의 탑을 쌓는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관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 보이던 북송(北宋) 시절, 관리를 역임했던 조경순도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 장춘오(藏春俉)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은거한다. 

바로 이 장춘오를 생각하며 소식은 「기제조경순장춘오“라는 시를 짓는다.

은퇴한 조경순은 자라날 후학을 기약하며 "소나무를 잔뜩 심"는다.

그 후학들이 자라나 어려운 시절에도 꼿꼿하기를 바라면서.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자 했지."

자신이 한때 누렸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화려한 봄을 장치 피어날 후학들을 통해 다시 보고자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물주 영역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조경순이 봄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직된 마음을 버리고 유유하게 산책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경순의 봄은 사라지지 않고 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머무를 수 있었다.

 

pp.17~20.

 

 

우리 사회는 인류와 기술의 융합에서 변환점에 다다랐다.

우리 뇌가 서로 소통하는 수십억 개의 뇌세포로 구성되어 있어도, 그 마법 같은 산물은 바로 인간의 개별적 의식의 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수십억의 뇌가 서로 소통하면서 인류 전체의 집단적 의식을 발현한다.

인터넷이 인간 뇌 의식을 통해 연결된 수십억 개의 컴퓨터로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가장 대담한 SF적 이미지도 넘어서는 전 세계적인 '기술 의식techno-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생명체는 음성되먹임negative feedback 고리들이 모여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내가 심한 배고픔을 느끼면 나는 음식을 먹고, 그럼  배고픔은 가신다.

이런 시스템에서 나는 욕구가 있을 때 그에 맞게 행동을 하고, 그렇게 욕구가 사라지면 나는 만족하고 시스템은 안정 상태로 돌아간다.

음성되먹임 고리에 기반한 시스템은 요구를 창조하고 전달할 수 있으며, 요구가 충족되면 원래의 균형 상태로 돌아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항상성 상태에서 생명체는 휴식을 취하여 스스로 재충전할 수 있다.

이 되먹임 고리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해서 경보음을 울리기 때문에 생명은 이런 음성되먹임

고리와 함께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

경보음이 울리면 시스템은 전원을 끄고 에너지 보존 상태로 돌아간다.

반면에 기술은 정지하거나 멈추는 일이 없는 양성되먹임postivie feedback 고리로 설계되어 있다.더 많이 굴러갈수록, 즉 우리가 게임이나 인터넷 서핑을 더 많이 할수록, 마우스 클릿 수와 시간과

관심을 더 많이 늘리는 쪽으로 유도하게끔 시스템이 설정된다.

기술은 일주일 내내 밤낮 없이 작동하여 인간의 신경 회로망을 빨리 돌려 힘 빠지게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세계는 기기가 고장 나서 수리나 교체가 필요할 때까지 작동한다.

그러다 시스템이 재부팅되면 멈춘 시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컴퓨터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더 열심히, 게임을 더 열정적으로, 생각을 더 빨리 하도록 유도한다.

인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기술은 인간의 생명 시스템을 소진시키며 기술 중독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틀림없이 기술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인간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돕는다.

기술을 적절히 사용하면 인간은 더 간강한 삶과 일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이 우리를 계속 몰고 갈 경우 뇌 건강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 또한 심하게 파괴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삶의 하드 드라이브 역할을 맡고 있다.

삶에는 TV며 휴대폰, 소셜 미디어, 앱이 확인해주는 운동 일정, 작업 중인 컴퓨터까지 수십억 가지의 '기술적 쿠키cookie'가 존재하며 우리 뇌는 하루 종일 이 쿠키들을 해석한다.

우리는 최상의 상태로 기능하기 위해, 하루에 여러 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휴지통의 파일을 지우고 뇌를 재시작할 의무가 있다.

음성되먹임 고리로 움직이는 생명 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 인간은 정기적으로 멈춤 버튼을 눌러야 한다.

손상을 만회하고 상태를 재측정하고 스스로 재건하여,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우리 뇌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수면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될지, 어떻게 그렇게 될지 선택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때에도 그저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도울 힘이 있다. 

테드 강연에서 나는 세대 차이와는 상관없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하나의 인간 가족으로서 우뇌 반구의 의식을 통해 서로 연결된 에너지적 존재입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이 행성 위의 형제자매로서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완벽하고 온전하며 아름답습니다."

 

pp.258~361.

 

 

정신이라는 바다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와 물보라를 일으킨다.

그러나 수면 아래로 깊이 들어갈수록 물결은 점점 잔잔해진다.

우리가 깊이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수면을 맴돌며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언제나 잔잔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곳에서 창의력, 명료함, 집중력, 성취감이 나온다.

그곳이 가닿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더 깊이 들어가는 것뿐이다.

멈추고 호흡하고 명상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놀고 자연과 연결한다.

긴장을 풀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실천한다.

혼자서도 행복한 장소를 찾는다.

커피 한 잔 또는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들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조용히 앉아 있는다.

도심 또는 산으로 하이킹을 떠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느낌, 감정, 아이디어를 아무것도 거르지 말고 일기장에 적는다.

몸을 움직인다.

예술 작품을 창조한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샤워를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한다.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매일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머릿속을 잠재우고 자기와 연결한다.

분주한 일상에 얽매이기 전에 아침 의식을 실천함으로써 연결을 우선시한다. 

"잘 지내요? 어떻게 지냈어요?"라고 물으면 "아, 정말 바빴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바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가오는 상대를 문전박대하는 일이며 그동안 만들어온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일이다.

자신이 언어 사전에서 "바쁘다"라는 말을 빼는 연습을 한다.

일주일 동안 도전해보자. 

다음번에 누군가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거든 정말로 어떻게 지내는지, 실제로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얘기한다.

그러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질문을 무시하는 일이며, 더 깊은 수준에서 소통할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마음을 연다.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될 준비를 한다. 더 많이 공유하다.

자신의 약한 구석을 숨기지 않는다.

취약함은 소통의 다리가 된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직원 및 동료와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너무 바쁘다"라는 핑계로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원망과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방법 따위로) 다른 사람을 도울 방법을 모색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이들이 많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라거나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거나 밖에 나가서 조깅할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깊이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하루하루 로봇처럼 일한다.

나는 수많은 임원과 함께 일하면서 정상의 자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타인, 세상, 우주와의 연결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연결을 우선순위에 두면, 시간은 언제든 낼 수 있다.

소통과 연결은 시간을 빼앗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연결이 곧 삶이다.

연결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고, 의미와 기쁨을 준다.

 

pp.258~260.

 

7위. 로스쿨

첫 번째 드라마는 김명민과 김범이 출연한 로스쿨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사실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인데 드라마 초반은 지루한 편이지만 보다보면 흥미진진해서 다음화를 계속 찾게 되는 드라마입니다.

법정 드라마 좋아하시면 추천드립니다.

6위. 작은아씨들

6위는 작은아씨들입니다.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 세 자매의 이야기로 의문에 사고에 항상 있는 파란 난초에 세 자매는 다른 방식으로 접하게 되고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맞서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개인적으로 PPL이 자연스러웠고 드라마 연출이 좋아서 몰입감 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 추리를 좋아하신다면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5위는 수리남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한 무소불위의 마약 대부로 인해 누명을 쓴 한 민간인이 국정원의 비밀 임무를 수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황정민, 하정우, 박해수 등이 출연하는 드라마입니다.

연기력은 보장되지만 액션, 느와르(?)장르를 싫어하신다면 별로일 듯 하지만 그래도 꽤 볼만했던 드라마입니다.

4위. 마이네임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추천 4위는 마이네임입니다.

한소희씨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조직에 들어가 새로운 이름으로 경찰에 잠입한 후 복수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로 반전이 있는 드라마입니다.

한소희 씨의 연기력이 무척 좋았고 박희순 씨도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입니다.

3위. 알고 있지만

3위는 바로 알고 있지만입니다.

한소희, 송강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인데요.

4위에 이어 한소희 씨가 3위를 차지했네요.

어쨌든 해당 드라마는 19금 드라마로 청춘들의 로맨스를 엿볼 수 있고 BGM이 상당히 드라마와 잘 어울려서 몰입감 있게 보았던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2위. 스위트홈

2위는 바로 스위트홈입니다.

이번에 스위트홈 2도 나온다고 하는데요.

욕망이 괴물이 되는 세상을 그린 드라마로 시즌1 공개 당시 송강보다 이도현 씨가 주목을 많이 받았었는데요.

보면서 우리나라 드라마도 많이 발전했네 나는걸 느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1위. 더글로리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추천 1위는 바로 더글로리입니다.

더글로리는 오랜만에 송혜교 씨가 복귀한 작품으로 유년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몰입감이 장난 아닌 드라마입니다.

특히 파리의 연인,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등 히트작을 집필한 김은숙 씨가 극본을 써서 더욱 화제가 됐는데 정말 볼만한 강추 드라마입니다.

 

간단한 퀴즈 하나.

다음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라크 전쟁. 엑손 발데즈 기름 유출 사건. 미국 교도소의 재소자 증가.

정답 : 모두 미국의 국민총생산, 즉 지금의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한 사건이다. 

따라서 모두 '좋은'일로 간주된다.

적어도 경제학자들의 음침한 눈으로 보기에는 GDP는 단순히 일정 기간 안에 한 나라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을 모두 합한 값이다.

자동소총을 팔든, 항생제를 팔든 상관없이 모두 전국적인 합계에 똑같이 기여한다(두 물건의 값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총량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음식의 종류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통곡물이든 돼지기름이든 쥐약이든 칼로리는 그냥 칼로리라고 보는 것이다.

GDP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시의 아름다움, 결혼 생활의 강점, 대중적인 논쟁의 지적인 특징"이라고 표현했던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케네디는 GDP가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한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GDP는 무보수 노동, 즉 인정人情 경제compassionate economy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양시설에 사는 노인은 GDP에 기여하지만, 집에서 가족이나 친척의 보살핌을 받는 노인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 노인을 돌보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무급 휴가를 얻어야 하는 처지라면, 노인은 오히려 GDP를 감소시키는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이 점에서는 경제학자들의 공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기심이라는 악덕을 미덕으로 바꿔놓았다. 

행복, 즉 주관적인 복지에 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데 그 정도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

1년에 1만 5000달러 정도. 그 선을 넘으면 경제성장과 행복의 관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미국인들은 50년 전에 비해 평균 세 배나 부자가 됐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일본을 비롯한 많은 산업국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의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돈은 더 많아졌고, 일하는 시간은 줄었고, 휴일도 늘어났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수명도 길어졌고, 건강도 좋아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국민행복지수는 1973년에 부탄의 왕축 국왕이 처음으로 퍼뜨린 개념이다.

하지만 마이클 엘리엇이라는 젊고 똑똑한 기자가 1986년에 국왕을 인터뷰해서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사를 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개념이 펴저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사의 제목은 이 개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표현했다.

"부탄 국왕: 국민행복지수가 국민총생산보다 중요하다."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십중팔구 왕이 높은 히말라야 산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산소 부족으로 고생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왕이 또 돼지 먹이를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행복을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설사 측정할 수 있다 해도 한 나라의 정부가 어떻게 행복을 정책으로 펼 수 있는가?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은 다른 개도국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산업국가 몇 군데에도 퍼져나갔다.

이 개념에 대한 논문도 나왔다.

학술회의도 열렸다. 찬사가 쏟아졌다.

"부탄은 오로지 돈만이 절대선이라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거부한 최초의 국가이자, 이 주장에 도전한 최초의 국가다." 제프 존슨은 《국민행복지수와 발전Gross National Happiness and Development》이라는 개론서에 이렇게 썼다.

캐나다의 철학자 존 랠스턴 솔은 국민행복지수가 눈부신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이 개념의 역할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

사람들은 과거의 담론을 바꾸려 하지 않고, 핵심에서부터 새로운 담론을 도입한다.

그래서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행복지수)가 그토록 중요하고 영리한 개념이 된 것이다.

 

pp.128~131.

 

 

나는 번역문을 첨삭하면서 관형격 조사 '~의'가 제대로 쓰였는지 유심히 본다.

외국어 투 문장을 양산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첨삭했지만 관형격 조사 '~의'를 본래 쓰임새에 맞게 잘 쓴 문장을 별로 본 적 없다.

다음 문장의 조사를 유심히 보면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보라. 

  인터넷의 발달은 정보 접근의 쉬움과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의'를 다른 조사로 바꾸고 명사구를 풀어 쓰면 더 한국어답게 쓸 수 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정보에 접근하거나 자기 역량을 펼치기도 쉬워졌다.

조사를 적절하게 바꾸어 번역을 완결 짓자.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비매품으로 제작하는 일 자체가 저작권법의 위반이다.

→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비매품으로 제작하는 알 자체가 저작권법을 어기는 일이다.

 

관형격 조사 '의'는 종속 개념을 뚜렷이 드러낼 때 자기 역할에 잘 들어맞는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나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공적인 영역에서 '나의 방송'이라든지 '내 영화'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얼핏 형식은 맞는 듯해도 그런 철없는 표현 같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는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드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주종 관계나 소유를 드러내는 '의'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고 명백한 주종 관계를 표시하려고 쓴다. 

라이너스의 담요

베르디의 오페라

알 파치노의 맹인 연구

관형격 조사 '의'를 잘못 쓰면 엉뚱하게 엉켜 버리기도 한다.

'한 통의 편지'는 미흡한 한국어지만 '편지 한 통'이라고 고치면 흡족한 한국어 구절이 된다.

'번역은 일종의 소통'이라고 쓰면 미흡하지만 '번역은 소통의 일종'이나 '번역은 소통과 비슷하다'라고 고치면 흡족하다.

다 같은 한국어 제목이라도 '의'를 잘못 쓰면 엉성한 번역으로 남는다. 

'종의 기원'이나 '과학 혁명의 구조'나 '암흑의 핵심'에서 '의'는 적절하지만 '침묵의 봄'에서 '의'는 적절하지 않다.

관형격 조사 '의'를 빼고 '참묵하는 봄'이라든지 '적막한 봄'처럼 써야 원뜻을 잘 전달한다.

배우 윌 스미스가 출연한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무난하고 좋은 번역 제목이다.

원제는 'The Pursuit of Happiness'인데 '행복의 추구'라고 어색하게 옮기지 않고 원뜻을 잘 살렸다. 

원제보다 흥미롭게 옮겨야 한다는 무모하고 쓸데없는 강박도 없다.

제목 번역을 아예 포기하고 음차 수준에 머물기로 작정한 듯한 영화판에서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pp.182~184.

 

 

고대 회의주의에서 언급되는 '회의懷疑, doubt'는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회의'란 앎의 문제에 있어서 확실성을 의심하는 지적인 태도들 말한다.

우리말의 회의주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kepticism'이고, 이 말의 그리스어 어원은 '스켑토마이skeptomai'라는 동사로 '···을 탐구하도'라는 뜻이다.

이 말을 좀 더 개념화하면,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지식이나 신념을 믿지 않는 의심 행위나 지적 태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회의라는 말에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당연시하는 인식론적 독단주의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의 또는 의심은 '탐구zētēsis' 개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회의하다skeptomai'는 '탐구하다zētēo'와 의미가 동일한 것이다.

회의주의자를 의미하는 '스켑티코이skeptikoi' 역시 '탐구자zētētikoi'와 같은 뜻을 지닌다.

물론 회의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세계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의심하고 한계 짓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탐구하다'라는 어원이 보여주듯이 회의주의는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연관된다.

그래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회의주의의 길skeptikē은 '탐구zētētikē의 길'이라고 규정지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와 연관된 섹스투스의 언급이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보이는 것들(현상들)과 사유하는 것들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서로 대립되는 사태들이나 진술들이 함께 있어서 평형을 이루므로, 우리는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판단유보에 이르며, 그 후에 마음의 평안ataraxia에 이르게 된다.

회의주의자는 보이는 것들과 생각하는 것들의 불규칙성을 해소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했으나, 이런 목적을 이룰 수 없었으므로 판단을 유보했다. 그런데 회의주의자가 판단을 유보했을

  때, 마치 물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예기치 않게도 마음의 평안이 회의주의자에게 생겨났다. ···

회의주의자의 최종 목표가 믿음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마음의 평안인 반면,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강제되는 것들과 관련해서는 감정의 순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섹스투스에 의하면 회의주의의 길은 '아포리아aporia의 길'이자 '판단유보의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일에 의문을 품고 탐구하는 길이며,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모르는 길이었기에, 그 길을 '아포리아의 길'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길을 따라 우리의 사유는 '사고의 유보'로 이어지는데, 그는 이를 어떤 것도 거부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판단유보의 길'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해서 고대 회의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원리인 '판단유보'가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유보를 지식은 발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적 무기력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이론과 체계가 획득될 수 있다'는 지적 자만이 거부의 대상이었듯이, '이론이나 체계가 발견될 수 없다'는 패배주의 역시 거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회의주의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중도中道, golden mean의 철학자'일지도 모른다.

 

pp.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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