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퀴즈 하나.

다음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라크 전쟁. 엑손 발데즈 기름 유출 사건. 미국 교도소의 재소자 증가.

정답 : 모두 미국의 국민총생산, 즉 지금의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한 사건이다. 

따라서 모두 '좋은'일로 간주된다.

적어도 경제학자들의 음침한 눈으로 보기에는 GDP는 단순히 일정 기간 안에 한 나라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을 모두 합한 값이다.

자동소총을 팔든, 항생제를 팔든 상관없이 모두 전국적인 합계에 똑같이 기여한다(두 물건의 값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총량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음식의 종류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통곡물이든 돼지기름이든 쥐약이든 칼로리는 그냥 칼로리라고 보는 것이다.

GDP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시의 아름다움, 결혼 생활의 강점, 대중적인 논쟁의 지적인 특징"이라고 표현했던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케네디는 GDP가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한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GDP는 무보수 노동, 즉 인정人情 경제compassionate economy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양시설에 사는 노인은 GDP에 기여하지만, 집에서 가족이나 친척의 보살핌을 받는 노인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 노인을 돌보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무급 휴가를 얻어야 하는 처지라면, 노인은 오히려 GDP를 감소시키는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이 점에서는 경제학자들의 공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기심이라는 악덕을 미덕으로 바꿔놓았다. 

행복, 즉 주관적인 복지에 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데 그 정도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

1년에 1만 5000달러 정도. 그 선을 넘으면 경제성장과 행복의 관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미국인들은 50년 전에 비해 평균 세 배나 부자가 됐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일본을 비롯한 많은 산업국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의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돈은 더 많아졌고, 일하는 시간은 줄었고, 휴일도 늘어났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수명도 길어졌고, 건강도 좋아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국민행복지수는 1973년에 부탄의 왕축 국왕이 처음으로 퍼뜨린 개념이다.

하지만 마이클 엘리엇이라는 젊고 똑똑한 기자가 1986년에 국왕을 인터뷰해서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사를 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개념이 펴저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사의 제목은 이 개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표현했다.

"부탄 국왕: 국민행복지수가 국민총생산보다 중요하다."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십중팔구 왕이 높은 히말라야 산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산소 부족으로 고생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왕이 또 돼지 먹이를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행복을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설사 측정할 수 있다 해도 한 나라의 정부가 어떻게 행복을 정책으로 펼 수 있는가?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은 다른 개도국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산업국가 몇 군데에도 퍼져나갔다.

이 개념에 대한 논문도 나왔다.

학술회의도 열렸다. 찬사가 쏟아졌다.

"부탄은 오로지 돈만이 절대선이라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거부한 최초의 국가이자, 이 주장에 도전한 최초의 국가다." 제프 존슨은 《국민행복지수와 발전Gross National Happiness and Development》이라는 개론서에 이렇게 썼다.

캐나다의 철학자 존 랠스턴 솔은 국민행복지수가 눈부신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이 개념의 역할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

사람들은 과거의 담론을 바꾸려 하지 않고, 핵심에서부터 새로운 담론을 도입한다.

그래서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행복지수)가 그토록 중요하고 영리한 개념이 된 것이다.

 

pp.1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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