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세어 돌아와 소나무 잔뜩 심고,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보고자 했지.

조물주 영역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버드나무 늘어저 낮은 집은 어둑하고, 붉은 앵두는 익을 대로 익어 계단 위로 떨어지는데,

언제나 물러나서 서원직과 더불어 양양의 방덕공을 방문할 수 있을까.

白首歸來種萬松, 待看千尺舞霜風,

年抛造物陶甄外, 春在先生杖屨中,

楊柳長齊低戶暗, 櫻桃爛熟滴階紅,

何時却與徐元直, 共訪襄陽龐德公.

- 소식(蘇軾), 「기제조경순장춘오(寄題刁景純藏春塢)」

 

해마다 봄이 오면 변함없이 진은영의 시를 읊는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푸른 계절의 머리를 밟고 서서, 고개 드는 봄꽃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옆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 불과하거든!"

누가 아니랬나. 짧은 생이 아쉬워 번식을 하고, 번식을 위해 애써 피었다 탄식하듯 지는 저 식물의 생식기들.

그 생식기의 깊은 그늘 아래, 봄의 속도를 묵상한다.

봄은 달콤한 것이라 빨리 지나간다.

일주일 중 주말에 해당한다. 눈 한번 깜박이면 월요일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예상치 못한 실연이나 죽음에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말한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내되 모든 것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출세와 업적의 탑을 쌓는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관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 보이던 북송(北宋) 시절, 관리를 역임했던 조경순도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 장춘오(藏春俉)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은거한다. 

바로 이 장춘오를 생각하며 소식은 「기제조경순장춘오“라는 시를 짓는다.

은퇴한 조경순은 자라날 후학을 기약하며 "소나무를 잔뜩 심"는다.

그 후학들이 자라나 어려운 시절에도 꼿꼿하기를 바라면서.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자 했지."

자신이 한때 누렸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화려한 봄을 장치 피어날 후학들을 통해 다시 보고자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물주 영역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조경순이 봄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직된 마음을 버리고 유유하게 산책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경순의 봄은 사라지지 않고 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머무를 수 있었다.

 

pp.17~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