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칭찬을 사양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만하거나 건방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바람직한 인간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문화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자기주장을 잘하고 개성이 있고 독립적인 인간상을 선호한다.

그에 비해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고, 협력적인 인간상을 선호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문화권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겸손이 중요하다지만 칭찬을 사양하면 겸손이고 칭찬을 수용하면 오만인 것일까?

 

둘째, 부채감과 부담감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는 받은 만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닌 이들일수록 칭찬을 받으면 부담을 느낀다.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기도 상대를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느끼는 것이다.

혹은 칭찬을 들으면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상대는 칭찬이 되돌아오기를 바라고 칭찬을 한 것일까?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려고 칭찬한 것일까?

 

셋째,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칭찬은 자기정체성과 맞지 않다.

특히 어린 시절에 부모한테서 야단을 많이 맞은 사람일수록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더 나아가 '나는 혼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수록 상대의 칭찬을,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여기거나 자기를 잘 몰라서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기를 비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크게 혼이 나지 않았지만 무엇을 해도 부모가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칭찬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겸손은 영어로 'humility'라고 한다. 부식토를 뜻하는 라틴어 'humilis'에서 온 말이다.

부식토는 동물의 사체나 식물이 잎과 가지 등이 분해되어 형서된 검은 빛의 토양으로, 생명이 자리가 아주 좋은 흙이다.

즉, 겸손은 자신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길러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꺼이 발판이 되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겸손의 본질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고 순응이나 복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겸손의 본질은 솔선수범하는 것이며,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그 토양이 되어주는 것이다.

 

칭찬을 사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칭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를 칭찬할 줄도 모른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자기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닌 건강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오만함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좋은 점에 대해서 관찰하고 인정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

특히, 자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단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자기칭찬은 오만함이나 우월감으로 흐르지 않고 자기성장으로 이어진다.

보편적 인간성을 바탕에 두고 자신의 긍정적인 면에 적극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인정하고 발달시키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에 샘을 내지 않고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다.

 

이는 자기친절의 중요한 기준이다. 자기 장점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할 수 있다.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 칭찬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잘한 것 또한 칭찬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법이다.

 

pp.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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