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탑 공사가 시작된 직후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에펠탑은 샹 드 마르스에 세워질 예정으로, 거기서 온 파리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샤를 가르니에를 위시한 파리의 많은 유지들은 이 '괴물'이 경관을 망치게 되리라는 생각에 경악했다.

300미터 탑에 대응하여 300인 위원회가 재빨리 결성되었고, 그 명단에는 파리의 가장 유명한 화가, 음악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르니에가 이끄는 이 위원회는 박람회 집행 감독에게 '예술가들의 항의 서한'을 보냈다.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그에게 가능한 가장 강력한 언어로 "쓸모없고 흉측한 에펠탑"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경고를 보냈다.

그런 흉물이 "거대한 시커먼 공장 굴뚝"처럼 우뚝 서서 파리를 내려다보게 된다면 파리의 망신이요 재난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가르니에와 에펠은 니스의 거대한 천문대를 함께 만들어 사이좋게 작업했었고, 그 전해에 천문대는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물론 에펠은 자기 몫의 작업에 강관을 사용했는데, 가르니에는 강철을 골조의 자재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적 재료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탑 공모전에서 에펠의 경쟁자였던 쥘 부르데와 마찬가지로 가르니에도 의문의 여지 없이 전통적인

사람으로, 석재를 완벽한 건축자재로 선호하는 터였다.

더구나 자신과 부르데가 건축가라면, 에펠 같은 엔지니어는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 줄 모르는 '일개' 기술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니에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은 에펠탑이 박람회의 하이라이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가르니에에게 울화를 안긴 것은 아마도 그 팀이 자신이 박람회에 출품한 '인간 거주의 역사'를 무색하게 만들리라는 전망이었다.

혈거시대부터 페르시아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주거 역사를 보여주는 서른 개 이상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비교적 수수해서, 가르니에의 예상대로 박람회가 끝나자 철거되었고 사실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에펠은 가르니에를 필두로 한 300인 위원회의 항의에 위엄 있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물론 엔지니어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반면 작가나 예술가의 심미적 취향이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엔지니어들의 작업 토대가 되는 자연법칙들의 아름다움과,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설계의 조화를 굳게 신봉하고 있었다.

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석조물만이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와 그의 악명 높은 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터이며, 이제 그는 그 점을 증명하기에 나섰다.

 

1887년 7월, 에펠의 탑은 실제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첫걸음을 떼어놓기 위해 그와 근처의 르발루아-페레 공장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전 사업들에서도 그랬듯이 에펠은 먼저 탑의 각 부분의 자세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부분들에 대한 중력과 바람의 영향을 세밀히 계산하게 했다.

그런 다음 각 부분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관리된 - 리벳 구멍 하나도 10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하게 뚫린 - 자기 작업장의 환경 속에서 개별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부품들을 관리 가능한 부분들로 미리 조립했으니, 에펠의 주장에 따라 현장에서는 드릴을 쓰거나 두드려 맞추는 작업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어떤 부품에 하자가 있으면 작업장으로 돌려보냈다. 통틀어 1만 8펀 개의 미리 조립된 부분들이 현장으로 배달되어, 일종의 거대하고 완벽한 이렉터 세트[집짓기 장난감] - 이 고전적인 조립식 완구는 사실상 에펠의 유명한 방식이 기초하여 고안된 것이다 - 를 이루었다.

 

pp.30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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