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형 -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나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은 50대 초반의 어른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제법 즐거웠다.
이젠 나도 어디 가서 어린 축에는 끼기 힘든 나이가 돼버렸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막내의 기쁨.
"쪼그만 게 어디서!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어리다는 것으로 구박당해 보는 것도 얼마 만인지!
더 어린 척, 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는 막내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토록 제법 어린 내가 끼어서인지,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그분들의 젊은 날의 회상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튀어나온 화두.
 

"우리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돌아가며 이야기하기.
한 남자 분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 했다.
그때는 인물도 좋았고 공부도 잘했는 데다 촉망받는 야구선서였는지라, 여자애들이 하루에 한 명씩 와서 고백했다며, "그때 연애 좀 실컷 할걸! 공부해야 한다고 다 거절했다? 그때가 전성기였단 걸 알았으면 안 그랬을 텐데!"
 

한 여자 분은 대학시절을 꼽았다.
"남자가 끊길 날이 없었어요!"
언제나 나 좋다는 남자가 줄 서 있던 그 시절에 더 신중히 남편감을 골랐어야 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고, 다른 남자 분은 30대 초반을 전성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인정도 받았던 그 시절이 가장 열정 넘치던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장난 반, 진담 반처럼 진행되던 각자의 전성기 얘기.
그러다 눈길이 내 쪽으로 쏠렸다.
"너는? 너는 네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였던 것 같니?"
 

그때 나는 생뚱맞게도 며칠 전 보고 온 콘서트가 떠올랐다.
넘치는 에너지와 넘치는 재기, 넘치는 자신감과 넘치는 열정, 그의 무대를 보고만 있는 나조차 손끝이 찌릿할 정도로 그는,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다.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요."
함께 공연을 봤던 후배가 말했다.
"지금이 나의 전성기구나, 그도 느낄까요? 어떤 기분일까요? 우리한테도 올까요? 전성기란 것이 과연?"
자못 진지한 후배에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린 농담.
"지나가 버렸으면 어떡하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거면?"
그건 정말 농담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거라면, 그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너는? 네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냐니까?"
딴 생각에 대답이 늦어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
"아직... 안 온 것 같은데요?"
정적.
나를 빤히 보는 어른들 머리 위로 수많은 말풍선들이 떠 있는 느낌.
그리고 그 말풍선들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긋 느껴졌다.
'역시, 너는 아직 젊구나!'

하지만 나는 싫다.
언제나 과거의 추억만을 되새김하며 살고 싶진 않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하지만 내게는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바로 내 자신."
정체하고 있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꿈을 위해 사랑을 떠나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사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오십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 얘기다.
심지어 우리나라 드라마도 아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세상물정 모르는, 철 덜 든, 좀 모자란 사람으로만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지라도,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마흔이 돼도, 쉰이 돼도, 환갑을 지나 엄마 나이가 돼도, 지금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 전성기는 아직, 안 온 것 같은데요?"
 

그래야 또, 꿈을 꿀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더, 나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야 앞으로 또한 열심히, 잘, 살고 싶다는 열정이 계속될 테니까.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p.73~77》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는,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누군가를 부럽다 말하기 전에 혹 노력해봤는가.
지금의 나, 지금의 내 생활을 바꿔보려 노력해봤는가.
머리로만 말고 실천해 노력해봤는가, 정말 최선을 다해.
 

너무 쉽게 불평하고 포기하고 타인의 삶을 부럽다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사람인지라, 나와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백 걸음 달려야 겨우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두 걸음이면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
그래도 나는 그런 불평도 일단 백 걸음을 다 달린 다음에나 할 수 있는 것, 그래야 괜한 투정으로 비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조금 오만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죽을 만큼 노력해서 이룰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노력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라는 아직 젊은, 아니 아직 어린, 그래서 오만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힘들었으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
내가 나로 태어난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세상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찾아오는 재앙이 있다는 것.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그저 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재앙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도 세상엔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내게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지나칠 만큼 휘청거렸다.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것이, 평생 해독제를 찾아 헤맸으나 처음부터 해독제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듯 허탈했고, 그 허탈함 안에서 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끙끙거렸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고?
내가 헛소리하면서 살았구나.
인생은 그저 랜덤일 뿐이었는데, 나의 의지나 노력 따위와는 상관없이 랜덤으로 축복과 재앙이 배정되는데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 치열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끙끙거리던 어느 날, 멍하니 드라마만 보고 있던 내게 불쑥 찾아와준 말이 있었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평온을 주옵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시고, 그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내게 찾아온 불행 앞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느라 바빠서,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들만 바라보며 자기 연민 떨어대느라 바빠서.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단,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조차 다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며 사는 바보가 되지 않기를.
나는 그런,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p.218~2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