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원 - 멍 때려라
대기업에 다니는 후배 한 명이 얼마 전 상사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평소 성실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후배였기에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어보니 예전에 없던 잦은 실수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공부든 업무든 한번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끝을 볼 정도로 몰입과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목표로 잡은 분량을 초과하면 초과했지 모자란 적이 없었다.
또한 보고서든, 기획안이든 약속 날짜를 칼같이 지키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요즘 보고서 제출 기일을 어기는 것은 보통이요, 업무와 회의 시간에도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계약서에 사인만 남은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서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중요한 사항을 미처 체크하지 못하고 그냥 사인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습관적, 강박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인터넷, SNS, 이메일 등은 우리의 집중력을 사정없이 흔들어놓는다.
한번 흩어진 집중력을 다시 그러모아 원래의 목적지로 되돌아가는 데는 처음 시작할 때보다 수십 배의 노력이 든다.
만약 공부하거나 일하다가 5분 정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다면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는 데 최소한 30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후배는 자신의 태도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리더들의 마인드가 문제라고 항변했다.
800여 명이 넘는 SNS 인맥을 관리하고 그들이 쏟아내는 무한대의 정보를 파악하려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기업 마케팅에서 SNS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데, 이를 관리하는 자신을 질책하느냐면서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요술 방망이 같은 스마트폰의 매력에 푹 빠진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지지를 보내주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SNS는 나를 흥분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중독과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의인 나조차도 스마트폰이 없거나 무선 인터넷의 접속 상태가 원활하지 못할 때 솟아오르는 짜증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진료 중에도, 회의 중에도, 이동 중에도 인생의 바이블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내가 기술과 정보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기술과 정보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도구는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있다.
의로운 자에게 무기가 주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되지만, 악한 자에게 무기가 주어지면 사람을 해치는 칼이 된다.
문제는 사람이지 도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디지털 기기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 언젠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이쯤 되면 인간이 과연 기술의 주인이 맞는지,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멍 때려라 p.94~96》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는 정보는 대부분 장기 기억에 저장된 내용이다.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인 단순한 데이터는 말 그대로 단편적인 정보일 뿐 '알고 있는 지식'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자동차를 봤다면 두뇌의 여러 기관 중 해마가 가장 먼저 작동하고 자동차의 촉감이나 냄새, 생김새 등의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해마에 새로이 들어온 정보는 방금 마트에서 장을 봐온 물건과 같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떠올려 보라.
바로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이다.
냉장고, 싱크대, 화장실, 베란다 등 제자리에 정리하지 않으면 집은 어수선해지고 정작 필요할 때, 물건을 찾지 못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억저장 장치인 해마가 정리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해마에 저장된 새롭고 단편적인 기억이 오래 묵은 좋은 포도주로 탄생하려면 경험과 노하우를 간직한 신피질과 소통할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바로 해마와 신피질의 소통이 시작된다.
우리가 자는 동안 해마는 신피질과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해 기존의 지식과 통합시킨다.
그날 배운 것을 스스로 복습하며 필요한 정보는 관련된 회로로 전달하고, 필요 없는 정보는 삭제한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해마는 저장된 기억을 필요에 따라 정리하고 정돈하는 숙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일생 중 3분의 1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숙면으로 보낸다.
여든 살의 노인이라면 대략 26년의 시간을 수면으로 보내는 셈이다.
갑자기 잠자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지만 이는 결코 아까워할 시간이 아니다.
멍 때릴 여유가 없다면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는 낮에 이뤄지지만, 업적을 이뤄내는 위대한 결정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과학자들이 인간의 수면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잠드는 순간까지 휴대전화를 손에 놓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보 검색과 게임을 통해 두뇌가 활성화된 채로 잠들면 멜라토닌이 억제되어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수면 부족은 무기력, 두통, 학습장애로 이어지고 집중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에도 문제가 생긴다.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고 싶다면, 건강한 수면인 필수다.
잠자리에 들기 전만이라도 휴대전화를 멀리하고, 낯선 분야의 책을 읽거나 그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과학자들처럼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바꿔줄 현안이 떠오를 것이다.
《멍 때려라   p.170~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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