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은 대체로 숨어 있고 가끔 극복되나 좀처럼 소멸하지 않는다.

억지를 부릴 수 있으나 억지의 힘이 물러나면 본성은 더욱 강렬해진다.

가르치고 타일러서 본성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본성을 바꾸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습관뿐이다.

자신의 본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과제를 너무 크거나 너무 작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과제가 너무 벅차면 빈번한 실패로 낙담할 것이요, 너무 수월하면 자주 성공하겠지만 진전을 뵈는 못한다.

그리고 부대(浮袋) 따위를 가지고 수영을 배우는 사람처럼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서 실행함이 좋다. 연습이 실제보다 힘들어야 큰 성과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강력해서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점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처음엔 본성을 잡아두어 시간적으로 정지하게 한다.

마치 화난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알파벳 스물네 글자를 반복해서 외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 양을 줄여가는 것이다.

마치 술을 끊는 사람이 건강을 해쳐가며 마시던 술을 식사 때의 한 모금 정도로 줄이고, 결국은 완전히 끝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한꺼번에 사슬을 풀 의지와 각오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대는 자유를 원하는가?

  그대의 가슴을 졸라매는 사슬을 한 차례 강렬한 안간힘으로 끊어라.

그러면 안식이 오리라.

굽은 지팡이를 반대편으로 구부려서 바로잡듯 본성을 반듯하게 할 수 있다는 옛말도 옳다.

물론 반대편 끝이 옳지 못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익힐 때 억지로 끊임없이 계속하지 말고 조금씩 짬을 두는 것이 좋다.

그 휴지(休止)가 새로운 출발에 힘을 준다.

또 완전치 못한 상태로 강행군을 계속한다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행하게 되어 이 두 가지가 한 가지 습관으로 몸에 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는 방법이 바로 알맞게 짬을 두는 것이다.

본성을 극복했다고 지나치게 안심해서는 안 된다.

본성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도 기회가 생기고 유혹을 받으면 되살아나는 법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처녀, 즉 여자로 둔갑한 고양이가 식탁 모퉁이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생쥐가 발밑에 나타나자 본성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유혹을 아예 피하든가, 아니면 그런 유혹에 자주 접하여 기회가 주어져도 쉽사리 동요되지 않도록 할 일이다.

사람의 본성은 사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꾸밈이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격앙된 감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선 문제, 낯선 사태에 임하여서도 잘 나타난다. 습관이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성에 맞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일에 몸이 익은 다음 "나의 영혼은 잘못된 자리에 오래 머물렀도다"

하고 탄식할 것이다. 학문에서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공부는 시간을 정해두고 함이 좋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 알맞는, 하고 싶은 공부라면 시간을 정해놓지 않아도 된다.

생각이 저절로 그곳에 집중될 것이므로 다른 일이나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약초가 아니면 잡초가 된다.

그러므로 약초라면 충분히 물을 줄 일이요,

잡초라면 뽑아버릴 것이다.

 

pp.16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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