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는 어때?"

"좋아!"

 

그 애 앞에는 뽀얀 국물의 기본 칼국수가, 내 앞에는 붉고 걸쭉한 국물의 팥칼국수가 놓였다.

메뉴를 고를 때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걔는 비건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자주 만나지 않는다.

업데이트되는 SNS 프로필 사진으로 생사 여부를 아는 정도의 관계다.

나는 그 애를 정말 좋아했을까?

칼국수에 쓰인 육수는 비건이 아니었을 텐데. 함께 올라온 겉절이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가끔씩 묻고 싶다.

그때 정말 괜찮았는지. 집에 가서 불편한 마음으로 일기나 시를 쓰지는 않았는지.

 

이후 언젠가부터 나는 한동안 비건과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오가면서 동물권에 관한 내 윤리관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 애 영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았고 그게 편했다.

나는 이 식사에 관한 내 가치관을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잘 발설하지 않았다.

나로 인해 타인이 겪게 되는 불편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 두려웠다.

유별나고, 함께하기 번거롭고, 손 많이 가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건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일 중 하나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면 별말 없이 고기를 먹었다. "고기를 먹자!"라고 한 건 아니지만 사실 아직도 이 사회는 일일이 소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육류를 먹게 되는 식문화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고기를 먹었다. 아무렇지 않게.

아니, 어쩌면 오히려 맛있게. 내 비겁함과 게으름을 무기로 나를 잘도 어겼다.

 

여전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전자레인지로 간단히 조리한 닭가슴살을 식탁에 올린다.

하지만 때로는 얼린 템페(발효시킨 콩을 뭉친 것으로, 인도네시아 전통 요리 중 하나)를 해동하고 원목 도마에 올려 슬라이스한 후 올리브오일을 적당히 두른 팬에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발효된 콩의 고소함과 달궈진 기름의 그윽한 향이 침샘을 자극한다.

과정과 결과 중 어떤 게 중요하냐는 물음은 내게 어불성설이다.

과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기에.어느 게 더 맛있냐고?

템페 요리다.

어느 게 먹을 때 더 기분의 좋으냐고? 당연히, 템페 요리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한다.

샐러드에 올릴 토핑을 고를 때 소고기와 병아리콩 사이를 수백 번 오간다.

떡볶이 위에 치즈를 올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사이에서도.

와인 안주로 올릴 육포와 통밀 크래커 사이에서도.가끔은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우유를 냅다 시리얼 위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부적을 쥔 것처럼 두유 팩을 쥔 손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하면 그래도 좀 더 나를 지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는 익숙함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순간은 중요하다.

 

쌓여가는 실패를 못 본 척하는 것은 자기 기만일 테지. 하지만 그럴수록 매일 조금씩 높아지는 실패의 탑을 부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높아질 자유를 줘야 하는 것 같다.

그것들이 미래의 내 선택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도록. '나 어제보다 이만큼 자랐어.

너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그 탑이 내게 반드시 묻도록.

 

pp.128~130.

 

 

그러나 경험이 말해준다. 내가 속한 팀의 퍼포먼스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 의외로 '존중'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제작비를 굉장히 많이 쓴다거나, 우리 회사에 큰 비용fee을 지불하는 광고주에는 신경이

더 쓰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존중에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나와 내 스태프들을 얼마나 믿어주고 의지하는가가 메일 속이나,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날이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 부분은 워낙 전문가시니까 잘하시겠죠. 저는 제가 잘 아는 부분만 체크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없던 힘이 솟고,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시간을 쓴다.

 

난 존중이 갖는 마법 같은 힘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퍼졌으면 한다.

그것이 일의 영역 밖이라도 좋겠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을, 나는 존중이라 생각한다.

혼솔, 혼밥의 시대라지만 지금의 위기는 혼자만 잘해서는 결코 답이 없다.

 

개인의 무결한 위생과 사회적 격리는 사실, 택배 노동자와 물류 시스템, 그리고 의료진들의 희생에서 시작된다.

의료진들에게 쏟아지는 경의만큼, 나는 택배 노동자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우리가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해 최소한으로 움직이려면, 누군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최대치로 움직여야 하니까.

 

스케일을 좀 더 키워서 지구적인 시선으로 봐도, 우리에게는 존중의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잊을 수 없는 대사를 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가치 있는   세상입니다.

죽은 고래도 살아 있는 고래보다 더 가치 있고요.

우리 경제는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움직였고, 기업은 규제를 받지   않았기에 계속 숲을 파괴하고 고래를 죽이고 땅을 파서 석유를 시추할 것입니다.

그게 지구를 파괴한다는 걸 알면서도. 후손들이 살   지구를 망친다는 걸 알면서도.

(중략) 애초부터 이런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마지막 수단은 이제 우리가 나무고, 우리가

고래라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 저스틴 로즌스타인Justin Rosenstein(前 구글 엔지니어)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과 지구라는 '플랫폼'을 공유하는 인간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삶의 자세는 '존중' 아닐까.

존중이 부족한 문명이 존립할 수 없음을, 지구는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질병을 통해 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거시적으로 우리는 지구 윌르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를 좀 더 존중해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이

아슬아슬한 안전을 유지해주는 이들에게 존중의 시선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존중이 최상의 미덕이 되는 사회라면, 오직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과 성별과 지역에 보내는 미움과 차별도, 분명 줄어들지 않을까.

이 질병의 끝에선, 서로를 조금 더 존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멋진 매너들이 일터에도 쌓여, '甲' 같은 올드한 단어에 '-질'처럼 우울한 접미사를 붙이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pp.217~222.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은 1980년 국제 채식주의자 회의에 참석하러 인도에 간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아이오와에 들러 주립 대학에서 한 번, 또 메인의 바우뒨 대학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 그이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강연을 했다.

한 청중이 사랑 어린 편지를 보내왔다.

"스코트 씨가 나이 아흔여덟에 보여준 힘과 내면의 정열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그이의 강연 기술이 마치 절정기에 이른 것처럼 느꼈습니다."

메인으로 돌아와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먹을 거리를 기르고 나무를 자르며, 글을 쓰고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계속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는 《나이먹음The Coming of Age》에서 "노인에게 건강보다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스코트는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평생에 한 순간도 따분해하거나 흥미로운 주제를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

보부아르가 말하기를 "노년이 전생의 부조리한 패러디가 아니라면 단 하나의 해답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존재에 의미를 갖게 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일 - 개인이나 단체 또는 대의大義를 위해, 사회 정치적이거나 지적이고 창조적인 직업에 헌신하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백 살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21년 동안의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얘기한다.

 

"여기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주의깊은 계획을 세운다.

그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젊은이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소박한 관심거리와 재치있는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의 욕구는 건전하며 대단한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보통 완벽하게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낙천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백 살을 넘긴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아주 드문 존재들이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1880년에 이렇게 썼다.

 

"반 세기 동안 나는 산문, 시, 역사소설, 희곡, 연애소설, 전설, 풍자와 서정시, 노래로 생각을 표현해왔다.나는 이 모두를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의 거의 천분의 일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무덤에 가면 나는 '하루 일을 끝냈다'고 말하겠지만, '내 생애의 일을 끝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의 하루 일은 다음 날 아침 또 시작될 것이다.

무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열려 있는 여행길이며 해질녘에 닫혔다가 동이 트면 다시 열린다.

내 일은 이제 시작이며 겨우 기초를 닦았을 뿐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이 완성을 향해 끝없이 오르는 것을 보고 싶다.

무한에 대한 갈망이 무한을 증명한다."

 

젊은이 중심의 문화에서 노년은 낮게 평가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노년에 나타날 수 있는 자질은 흔히 무시되거나 경시된다. 노년에 얻어지는 직관, 지식, 지혜, 훌륭한 유머는 젊은 시절에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당신 뜻대로As You Like It'의 아담처럼 스코트의 나이는 '서리가 내렸으나 온화하고 원기있는 겨울' 같은 것이었다.

목표와 자극을 주는 일이 앞에 펼쳐지는 가운데 그이의 노년은 충문한 시간이었다.

스코트는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원기를 잃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왔다.

그이의 칠십대는 노령이 아니었으며, 팔십대는 노쇠하지 않았고, 구십대는 망령이 들지 않았다.

그이의 정신은 팔십대 후반에도 여전히 분별있고, 정확하며, 예민하여 여느 때처럼 강연하고, 책을 읽고 날마다 글을 썼다.

스코느는 말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이제 그이는 그 끝에 마주서고 있었다.

아흔여덟 살에 인터뷰를 하면서 "아흔아홉까지 살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그이의 푸른 눈이

빛났다.

"당신이 아다시피 그것은 확신할 수 없는 전망입니다.

나이가 들면 표현력과 직관력이 떨어집니다.

시간말고는 내게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계속 살고 싶습니다."

 

pp.213~215.

 

 

사람들이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칭찬을 사양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만하거나 건방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바람직한 인간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문화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자기주장을 잘하고 개성이 있고 독립적인 인간상을 선호한다.

그에 비해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고, 협력적인 인간상을 선호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문화권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겸손이 중요하다지만 칭찬을 사양하면 겸손이고 칭찬을 수용하면 오만인 것일까?

 

둘째, 부채감과 부담감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는 받은 만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닌 이들일수록 칭찬을 받으면 부담을 느낀다.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기도 상대를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느끼는 것이다.

혹은 칭찬을 들으면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상대는 칭찬이 되돌아오기를 바라고 칭찬을 한 것일까?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려고 칭찬한 것일까?

 

셋째,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칭찬은 자기정체성과 맞지 않다.

특히 어린 시절에 부모한테서 야단을 많이 맞은 사람일수록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더 나아가 '나는 혼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수록 상대의 칭찬을,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여기거나 자기를 잘 몰라서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기를 비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크게 혼이 나지 않았지만 무엇을 해도 부모가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칭찬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겸손은 영어로 'humility'라고 한다. 부식토를 뜻하는 라틴어 'humilis'에서 온 말이다.

부식토는 동물의 사체나 식물이 잎과 가지 등이 분해되어 형서된 검은 빛의 토양으로, 생명이 자리가 아주 좋은 흙이다.

즉, 겸손은 자신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길러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꺼이 발판이 되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겸손의 본질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고 순응이나 복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겸손의 본질은 솔선수범하는 것이며,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그 토양이 되어주는 것이다.

 

칭찬을 사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칭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를 칭찬할 줄도 모른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자기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닌 건강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오만함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좋은 점에 대해서 관찰하고 인정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

특히, 자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단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자기칭찬은 오만함이나 우월감으로 흐르지 않고 자기성장으로 이어진다.

보편적 인간성을 바탕에 두고 자신의 긍정적인 면에 적극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인정하고 발달시키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에 샘을 내지 않고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다.

 

이는 자기친절의 중요한 기준이다. 자기 장점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할 수 있다.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 칭찬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잘한 것 또한 칭찬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법이다.

 

pp.24~27.

 

 

대면 상호작용에는 당신이 하려는 말의 언어적 내용을 넘어서는 어떤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친밀함이 만들어진다.

당신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그 사람의 눈 흰자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도쿄 테크놀로지 연구소의 고바야시 히로미Kobayashi Hiromi와 고시마 시로Kohshima Shiro는 인간의 눈이 흰색의 공막(안구 중앙의 홍채를 둘러싸고 있는 섬유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도 지적했다.

 

다른 영장류는 모두 홍채 색과 눈 주변 털 색에 가까운 갈색 또는 진한 갈색의 공막을 가지고 있다.

다른 종고 비교할 때 인간의 공막은 홍채의 크기에 비해 훨씬 크다.

우리의 두 눈은 얼굴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짙은 색 홍채를 흰색 조직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거나 계속 바닥을 내려다보는 사람과 대화할 때 어색하다고 느낀다. 목소리에 아무런 표현도 담기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에 매력을 느끼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와 관련된 '봉쇄'는 우리에게 뜻밖이긴 하지만 매우 유익한 실험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봉쇄를 통해 2가지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좋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지는 않지만 매우 유용한 것이다.

 

좋은 측면은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주 창조적인 방법으로 인터넷의 디지털 기능을 활용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화상 합창단, 노래 이어 부르기, 화상 식사라는 방법이 등장했다.

특히 화상 식사는 문자메시지를 사교적으로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음식을 만든 다음 자리에 앉아서 가상의 공동 식사를 코스별로 함께 즐긴다.

화상 식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대부분 친구보다는 가족고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족은 중요한 존재다.

 

부정적인 측면은 줌과 스카이프 같은 어플리케이션들이 대규모 사교 모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상회의에서는 사실상 한 번에 한 사람만 말을 할 수 있으므로 강연 같은 형식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큰 탁자에 둘러앉아 있을 때처럼 어떤 이야기는 특정한 사람과 따로 나눌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화상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여러 개의 소규모 대화로 분할될 수가 없다.

그 결과 외향적인 사람이 대화를 주도하는 동안 수줍음이 많거나 내향적인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게 된다. 업무 관련 회의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3~4인이 넘는 사람들이 효과적인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로서 화상회의 어플리케이션이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디지털 미디어들은 우리가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없을 때 우정이 현상 유지되도록 하는 데는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디지털 미디어가 하는 일은 우정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지 않을 때 우정이 자연스럽게 식어가는 속도를 늦춰줄 뿐인 것 같다.

결국 진짜 친한 사이가 아닌 다음에야 다지털 세계의 어떤 것도 그 친구 관계가 그냥 아는 사람(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의 관계로 조용히 변해가는 현상을 막아주지 못한다.

 

우정이 계속되기를 언할 경우 그저 '불꽃'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때때로 그 친구를 만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면 상호작용의 감정적인 성격,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와 표정에 담을 수 있는 함축된 감정, 이런 것들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눈빛이 마주칠 때의 감각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당신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pp.526~528.

 

 

전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향후 몇 년간은 미국에 밀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들과 관계를 끊지 않는 한 말이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곳의 해상 방위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했다.

페르시아만과 홍해는 비좁은 데다 하나같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국 해군력이 없다면 적대 세력은 인도양이나 수에즈 운하로 가는 이 나라의 수출로를 봉쇄할 것이다.

 

그런데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도 중국과의 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 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화웨이가 중동 지역에서 성사시킨 12건의 5G 계약 가운데 한 건에 서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자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권위 있는 중동 정치 분석가인 미나 알 오라이비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 자본주의라는 중국 모델에 대다수 아랍 지도자들은 매료됐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별개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다수 이 지역 정부들이 추구하는 것이어서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성공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지요."

 

이스라엘과 관해서는 최근 들어 다시 미래를 내다보면서 언어 폭탄 공격도 잦아들고 향후 양국 간의 관계 정상화를 전제로 한 비즈니스 실무 접촉도 조용히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다.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ad bin Salman, MBS)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타협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팔레스타인에 대해 맨 먼저 인내심을 잃은 아랍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긴 해도 다른 이들을 앞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실질적 지도자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왕세자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랍에미리트는 바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2020년에 이스라엘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원래 살만 국왕은 이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왕세자가 대다수 자국 청년들은 기성 세대만큼 그 문제에 민감하지 않다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걸프 국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체 방어 능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그들과 거래할 용의도 있다.

이란의 위협을 늘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다.

또 사막에 꽃을 피우는 기술도 자신들 국가의 농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화해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이는 또한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 선행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과는 결코 화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다수 중동 전문가들의 분석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들이 손바닥만한 땅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나머지 세계는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 상황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정착촌에 대해 강경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현실을 흩트리고 싶어 한다고 볼 이유는 많지 않다.

 

MBS 왕세자는 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 간의 합의를 숙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부친에게는 함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왕세자가 이를 지지했던 것은 한편으론 권력을 지키는 데에 요구되는 정치적 책락을 바라본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미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범아랍 민족주의(모든 아랍 민족들 간의 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에 대해서도 냉철하고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지역에도 단일 아랍 국가라는 개념이 퍼져 갔지만 크게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 이집트, 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곳의 아랍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층은 군주제에 대한 충성을 권장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시간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국민들도 잘못된 지도자를 뽑을 수도 있다.

이 나라의 관심사는 중동 지역에 느슨한 형태의 경제 및 정치 포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1년에 무역을 간소화하려는 구상으로 만든 걸프협력이사회의 6개 회원국 가운데 핵심 창설 멤버가 되었다.

 

pp.157~159.

 

 

좋은 처음도, 나쁜 처음도, 미지근한 처음도, 많은 여운이 남는 처음도 있었다.

 

첫 홈페이지

첫 홈페이지를 만들 때는 막상 둘이 같이한 작업이 없어서 각자 따로해온 일들을 주섬주섬 모아야 했다. 영 붙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함께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각자 이런이런 일을 해왔지만 의기투합해 새롭게 무언가를 해보려고 합니다"라는 어떤 기세를 보여주는 수밖에. 다행히 원하는 도메인은 아직 주인이 없었다.

여러모로 엉성했대. 그러나 홈페이지는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준다고 생각한다.

울릴 만한 작업이 없다 싶어도 만드는 것이 좋다.

주솔르 선점하고 간단한 문구라도 걸어두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첫 응원

나는 기억한다.

태연함과 뻔뻔함이 약간은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도메인과 짧은 글을 여기저기 올리자 생각보다 많은 응원을 받았다.

진심으로 응원을 해주신 분도, 별 생각 없이 지나가다 툭 달아주신 분도 있었겠지.

그땐 정말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첫 깨달음

웹, SNS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나의 에고를 조금씩 흩뿌리고 다녔던 것이 시간이 지나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자의식의 조각들이 어디까지 흘러갈기 모르기에 무척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름을 걸고 회사를 연 사람의 시작에는 더없이 도움이 됐다.

나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도가 있는 클라이언트의 의뢰는 소중하기 때문에. "잘 보고 있었어요" 하며 작업을 의뢰하거나 언젠가는 기약하는 분들을 만나면 일의 성사와는 별개로 커다란 동력을 얻었다.

되도록 어떤 사안에 대해 단정 지어 이야기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있어선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싶다.

본인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적당히 사용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드러내야 누군가가 나를 알게 된다.

우리도 타인을 그렇게 발견하니까.

물론 모두가 나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나에게 관심이나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소수가 어떤 인연으로 다가올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첫 견적서

처음으로 견적서를 적어 보냈는데 당시 우리를 섭외했던 팀에서 연락이 왔다.

숫자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두 배의 금액을 제시했다.

그렇게나 잘 몰랐다.

그때 고쳐주시지 않았다면 기준을 모른 채 한참을 더 헤매고 또 해맸을지도 모른다.

아찔하다.

지금도 마음속으로 무척 감사드리고 있다.

내가 하는 노동의 가치를 제대래 책정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후려치거나 곤란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첫 출장

첫 출장은 그해 여름, 남해로 5성급 리조트를 촬영하러 가는 일이었다.

꽤 규모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포트폴리오도 거의 없는 무명에 가까운 우리에게 연락이 온 것이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6월의 남해는 무척 아름다웠고, 1박 가격이 어마어마한 회원제 프라이빗 리조트를 구석구석 촬영하고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지만, 사실 디테일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첫날 촬영 후 극심한 위경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무리를 해서 응급실을 찾은 적이 두어 번 있다.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뭘 해도 오래가지 못 하겠구나 느낀 첫해이기도 했다.

 

첫 월급

예상은 했지만 첫 월급은 형편없었다.

벌어들인 돈이 수익이 아니라, 이것저것 떼고 또 이것저것을 내고 남는 돈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감각을 익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첫 미팅을 하러 가던 길의 설렘, 첫 계약을 따냈을 때의 기쁨, 첫 실수 뒤에 따라오던 절망감과 부끄러움… 수많은 처음들이 있었다는 건, 돌이켜보면 악의 없고 서툴렀고 의도와는 정반대인 엉망인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기꺼이 일을 주고 노동의 대가를 주며 우리에게 믿음을 내어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수많은 처음들이 우리에게 와서 부딪친다. 피했으면 좋았을 일도, 언젠가는 맞서야 했을 일들도 있다.

어쨌든 잘 겪어내야 처음이 된다.

그래야 그다음이 있으니까. 지식이자 끝이 되지 않도록. 다가오는 출발들을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있다. 숙련된 내일을 만나고 싶어서 수많은 처음들을 넘는다.

 

pp.36-40.

 

 

정월, 제후 및 장상이 함께 한왕을 높여 황제로 삼기를 청했다. 한왕이 말했다.

"나는 황제란 어진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라고 들었소. 헛된 말과 빈말로 제윌르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나는 감히 황제의 지위를 감당할 수 없소."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대왕께서는 가난하고 미천한 평민에서 일어나 포악하게 반역한 자들을 정벌해 천하를 평정하고 공적이 있는 자에게 땅을 나눠 주고 왕후로 봉하셨습니다.

대왕께서 황제의 존호를 받지 않는다면 모두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신등은 목숨을 걸고 [황제가 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을] 고수할 것입니다."

 

한왕은 세 번을 사양하고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빈드시 이익이라고 여기니 나라에 이익이 되겠구려."

 

갑오일, 범수范水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말했다.

"의제에게 후사가 없는데 제왕 한신이 초나라 풍습에 익숙하므로 옮겨서 초왕으로 봉하니 하비에 도읍하라.

건성후 팽월은 양왕으로 봉하니 정도에 도읍하라.

또한 한왕韓王 신은 그대로 한왕으로 봉하니 양적에 도읍하라.

형산왕 오예를 옮겨서 장사왕長沙王으로 봉하니 임상臨湘에 도읍하라.

파군의 장수 매현은 나를 따라 무관에 진입한 공이 있으니 특별히 파군에 고마움을 표하노라. 회남왕 경포, 연왕 장도, 조왕 장오는 모두 봉호를 바꾸지 말고 전과 같이 두라."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었다.

고조가 낙양에 도읍하니 제후들이 모두 신하로 귀의했다.

전 임강왕 환驩은 항우를 위해 한나라를 배반한 죄로 노관과 유가를 보내 그를 포위하라고 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야 항복하니 그를 낙양에서 죽였다.

 

5월 병사들을 모두 해산해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제후의 자제 중 관중에 있는 자에게는 부역을 열두 해 면제해 주고 돌아간 자에게는 부역을 여섯 해 면제해 주었으며, 한 해 동안 부양해 주기로 했다.

 

고조가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고조가 말했다.

"열후와 장수들은 감히 짐에게 숨김없이 속내를 말해 보시오.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이오?"

 

고기와 왕릉이 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시어 다른 사람을 모욕하지만 항우는 인자하면서도 사람을 아낄 줄 압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을 공격해 땅을 점령하게 한 뒤 항복을 받아 낸 자에게 그곳을 주어 천하와 이로움을 함께하셨습니다.

항우는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 공이 있는 자에게 해를 끼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며 싸움에 이겼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공적을 주지 않고 땅을 얻고서도 다른 사람과 이로움을 나누지 않았으니,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그러자 고조가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군막 속에서 계책을 짜내 1000리 밖에서 승리를 결판내는 것은 내가 자방張良만 못하오.

나라를 어루만지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 도로를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賀만 못하오.

100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어김없이 이기고 공격하면 어김없이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빼어난 인재이지만 내가 그들을 임용할 수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만 있었으면서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오."

 

pp.36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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