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은 동기부여를 한다.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다. 인생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
이것을 다하고 살기는 힘들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강하게 동기 부여하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동기부여를 가장 잘 하는 것이 바로 책이다. 책은 당신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힘이 없고 우울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성공에 관련된 책을 읽어 보라.
그러면 반드시 당신은 색다른 동기 부여를 받게 될 것이다.

 

2. 책은 정확한 지식을 전달한다.

책은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지식과 정보를 알려준다.
잘 만들어진 책은 엄청난 지식을 전달해 준다.
즉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은 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준다.
텔레비전을 통한 지식은 대부분 주도성을 키우는 지식보다는 의존성 지식을 전달한다.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지식을 담은 정보 교재는 대부분 책으로 이뤄져 있다.

 

3. 책은 당신의 영원한 자산이다.

이사 갈 때 책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은 당신이 죽을 때 까지 있을 것이고 당신의 메모가 남겨진 책은 자녀에게 훌륭한 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다.
당신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길 책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자녀교육 핵심은 고기를 사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고기는 먹으면 끝이지만 고기 잡는 법을 배우면 영원히 당신 것이 된다.
그리고 도둑은 당신 재산을 도둑질 할 수 있지만 당신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혜는 도둑 잘 하지 못한다.

 

4. 책은 집중력을 잘 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기억이 가장 잘 남는다.

그 어떤 학습보다 가장 높은 효율을 만든다.
왜냐하면 책을 읽을 때는 이것저것 다 할 수 없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하면서 식사하면서 동시에 하기 힘들다.
책을 읽을 때는 책만 읽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책을 읽을 때는 누구나 집중해서 읽기 때문에 집중력을 키워준다.

 

5. 책을 사는 돈에 비해 100배 이상의 가치를 준다. 경제성을 높여 준다.

지식화 사회에서는 지식에 대한 돈 가치는 앞으로 갈수록 늘어 날 것이다.
유명한 사람의 워크숍, 세미나, 특별강연 등에 직접 참가하려면 아마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이다.
반면 이런 사람들이 워크숍, 세미나, 특별강연 등에서 행한 것들은 반드시 책으로 나와 있다.
이들의 주 수입원은 바로 책을 통한 인세 수입이 큰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런 행사들은 책을 알리기 위한 한 방법인 줄도 모른다.
비용에 관해서는 책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가 높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책을 통한 지식은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예를 들면 술 먹는데 드는 비용과 책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을 비교해 보면
아마 술을 먹는 데 드는 비용이 훨씬 많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술이 책 백 권의 돈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술은 먹고 나면 끝이지만 책은 영원히 당신 서재에 남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값비싼 술을 먹는 사람일 수록 책에 지불하는 비용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비싼 술 먹는 횟수대로 결국 망하는 것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술은 먹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책은 영원히 당신 서재에 남는다.
또한 사치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책을 구입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사치하는 사람은 사실은 순 자산의(자산-부채) 개념으로 보면 거의 순 자산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즉 진정한 부자가 아닌 대부분이 빈 껍데기다. 인생에 있어 무엇이 더 중요하지를 잘 판단하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6. 책은 당신의 훌륭한 스승 노릇을 한다.

인생에 있어 멘토는 반드시 필요하다(너무나 잘난 당신에게 스승이 가당찮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진정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멘토(Mentor)를 이 사회에서 찾기는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멘토는 바로 책이다.
무엇을 시작하고자 할 때 어떤 어려움에 봉착할 경우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할 때
책은 당신에게 훌륭한 스승 역활을 할 것이다.

 

7. 책은 능력을 향상시켜준다.

능력향상의 첫걸음은 지식에서 출발한다.
지식을 배우지 않고서는 당신은 절대 실력을 쌓을 수 없고 또 능력을 쌓을 수 없다.

지식은 바로 책을 통해서 가능하다.
역사 발전은 바로 책의 역사와 동일하다.
역사의 발전과 기술전수는 책을 통해 이뤄졌다.
책은 곧 지식이다. 지식이 곧 책이다.

 

8. 책은 당신의 생각과 생활을 건전하게 만든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책이 있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당신은 위인들의 운명을 바꾸게 한 책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있다.
가만히 있으면 게으른 생각을 하게 된다.
저절로 타락 적이고 비생산적인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
따라서 당신은 항상 생각을 건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매일 매일 훈련을 해야 한다.
책은 당신 생각과 생활을 건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9. 책은 건강한 습관을 만든다.

좋은 책을 잘 선택하고 읽게 된다면 엄청난 실력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부심을 갖게 되어 자연히 반복해서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된다.
그것이 또 일정한 생활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면 나아가 운명을 결정짓는 강력한 습관이 만들어지게 된다.
좋은 책을 읽으면 더 좋은 책을 읽게 되고 나아가 당신은 책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만들게 된다.

 

10. 책은 기분을 전환시켜 준다. 나아가 나쁜 감정을 좋은 감정으로 만들게 한다.

나쁜 감정 상태에서는 절대 어떤 일도 성공적으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좋은 기분 상태일 때만 성공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당신이 늘 좋은 기분상태를 유지한다면 당신의 업무능력은 상당히 향상될 것이다.
좋은 감정상태는 책을 통해서 가능하다.
따라서 당신에게 좋은 감정상태를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을 읽어라.
그런 책을 읽으면 반드시 기분 좋은 감정상태를 만들 수 있다.

 

11. 책은 당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나아가 당신인생을 깊게 만든다.

건강한 인생관과 가치관은 다양한 간접경험으로 가능하다.

간접경험을 단시간 내에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당신은 책을 통하여 위대한 위인들의 인생을 배울 수 있다.
위인들의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의 긴 인생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하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기적이다.
그들이 한 평생에 걸쳐 터득한 귀중한 교훈들을 한 권의 책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기적이다.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을 통해 분명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을 통해 "그래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어." 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또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래 나는 이런 인생을 살면 안 되겠어"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또 책을 통한 간접경험은 사람을 발전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을 통한 간접경험은 뚜렷한 인생관과 명확한 가치관을 만들게 만든다.

 

12. 책은 자기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 모습과 비교를 하게 되므로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자기성찰은 조용한 시간에만 가능하다.
책 읽기는 자기성찰 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므로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자기성찰이 가능한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급적 책을 읽을 때는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라.
그리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책 읽는 효율을 최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집중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집중하지 않고 빨리 읽는 책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책 읽기는 양이 아니라 집중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자기성찰은 반드시 인생관과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자기성찰 없이는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질 수 없다.
인생이라는 먼 여행길에서 인생관과 가치관은 당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되는 대로 살아가고. 순간적인 기분으로 살아간다면. 인생은 당신에게 반드시 참혹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 것이다.

 

책을 통하여 자기성찰을 가져라!

 

《무정에세이》를 처음 만난 건, 책이 출간되고 몇 달 후 입춘을 막 넘긴 무렵이었다.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다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에서 반쯤 빈둥거리듯이 이 책 저 책 살펴보던 중에 우연히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정에세이.' 가만, 에세이의 제목에 '에세이'라는 말을 쓰던가.

피천득 작가의 수필집 《수필》도 있으니 아주 터무니없는 제목은 아닐 것이다.

한데 그 앞의 '무정'은 무엇인가. 온정 에세이, 다정 에세이, 애정 에세이라고 해도 독자를 유혹할 수 있을까 말까 한 판국에 '무정無情'이라니. 정이 없고 쌀쌀맞은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

그렇다면 '무정에세이'란 온기를 식힌 무덤덤한 마음으로 쓴 산문이라는 뜻일까.

 

희망찬 선언도 확고한 체념도 아닌, 가만히 바라보고 무단히 주저하는 문장들은 내 마음의 빛이 닿지 않는 곳, 무정의 그늘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관객이 거의 없는 극장 안에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통로를 기어 다니고 있던 사람. 눈 오는 겨울밤, 시골 읍내의 문구점 앞에 놓인 구식 오락기계로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초등학생의 뒷모습.

종로 한복판에 있는 어느 학원 앞에서 가방도 없이, 책과 공책과 필통 같은 것들을 들고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여학생. 모두 사소한 일, 부질없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다. (…)

그러나 그 순간이 나에게는 세상의 진짜 중심처럼 느껴진다.

"(p38) 온정의 마음은 잠시 제쳐둘거라고 단언했던 제목과는 달리, 작가는 계속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삶의 그늘과 그늘 아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린다.

다가가 들릴 듯 말 듯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다.

어째서인지 그는 자꾸만 무정한 마음을 먹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거리에 나서면 온갖 말들이 우리를 압도하는 세상. 서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세이가 꽂힌 서가 앞에 서서 쭉 제목들을 훑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무정의 책 하나쯤 세상에 꼭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 그러나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알록달록한 그 말들은 머지않아 터져버릴 풍선처럼 공허하게 떠다니고 있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 그이의 얼굴은 어째서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만 하는지.

누구나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 사랑과 환대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건지.

 

위로의 말들과 혐오의 말들, 저열한 말들과 그럴싸한 말들이 범람하는 세상이라서, 그 말들 속을 헤치고 걸어가야 하는 우리는 가능한 예사로운 눈빛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다가 결국 울음 같은 것은 아예 나오지 않게 되는 단단한 마음"

(p287)은 종종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강인함으로 여겨지곤 하니까.

그러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굳어지고 두려워진 마음 한구석에 "햇빛이나 바람처럼 목적 없이 흩어지고 퍼져 나가는 선량함"(p258)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어떨까.

《무정에세이》는 나직이 묻는다. 무정한 마음이란 짐짓 사소한 아픔에 무뎌졌다고 믿었던 마음의 저편 아닐지.

우리는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저편 어딘가에 안간힘을 쓰는 내가 있는 건 아닌지. 나를 지켜내기 위해, 드물게는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

 

pp.128~130.

 

"무정에세이"

 

권력과 책임.........베른하르트

솔선수범 : 남보다 앞서서 옳고 정당한 행동을 하거나,
                어려운 일의 감내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됨

 

철학자이자 인성교육 세미나의 진행자인 베른하르트 그림이 들려주는 최고의 리더십을 위한 反마키아벨리즘. 권력이 얼마나 밀접하게 무력과 열등감, 두려움과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주며 독자들 자신의 권력적 성향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권력을 사용할 때만이 인간은 직업과 개인적 삶 속에서 타인과의 유익한 공통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 '권력!'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꽃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 권력의 본질과 권력이 지닌 파괴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통찰한 책, 《권력과 책임》이 출간됐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전문경영인인 베른하르트 그림이 쓴 이 책은,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국민에 대한 봉사를 외치면서도 왜 막상 권력을 움켜쥐게 되면 그토록 표변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권력의 속성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권력은 물론 기업 또는 가정과 같은 보다 작은 사회에서도 동일하다.
저자에 따르면, 권력은 마약과도 같아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욱 많이 원하게 마련이다. 배고픔, 갈증, 섹스는 만족의 한계가 있지만 권력은 그런 한계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이 만족하는 것은 오직 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게 될 때이다.
다시 말해서 권력의 소유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성장이 기쁨을 주고 쾌락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권력이 맛보여주는 '더 높아진' 느낌이 점점 더 크고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하여,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사람이 권력을 추구하게 되는 동기는 바로 '더 강해지고 중요해진다'는 감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격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도 이런 감정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점에서 권력남용의 파괴성과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권력에 어떤 고삐를 채워야 하는지를 탐색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삐뚤어진 권력에 대한 전염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도록 자극하면서, 책임의식을 지니고 권력을 다루는 자만이 유익한 결속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통찰케 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탐욕스럽고 무분별하게 권력에 대한 욕구를 추구해왔다.
권위주의와 이해관계에 따른 무분별한 행위에 대해 방해받지 않는 권력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불문하는 마키아벨리즘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권력에 대한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의 어떤 성향이 탐욕스럽게 권력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남용하게끔 부추기는 것일까?
저자는 열등감과 같은 개인적 콤플렉스나 권력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싶어하는 그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지도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과 관계가 있고, 권력은 그 영향력에 강력한 힘을 미치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권력을 필요로 하고, 그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약이 그러하듯 권력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위험하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권력은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해치는 양날의 검이다.
그러하기에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제어하기 위한 책임감이 지도자에겐 필수적이다.

'권력병'의 처방은 오로지 책임!
오늘날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과 같은 말로 집중화된 권력을 비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숭배하고 신격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권력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판단기준은 존재하는가?
권력의 본질에 관해서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권력을 이해하고, 권력을 통해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동으로 바꾸는, 즉 권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권력이 올바르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권력을 사용해야만 가능하며, 권력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내린 결정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오직 책임감을 가지고서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만이 두려움 없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권력이든 예외 없이 길들여져야 한다.
즉 권력에는 고삐, 통제, 제한 등과 같은 반대권력, 즉 책임이 주어져야 한다.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권력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든 인간과 자연의 존립과 안위 등에 대해서까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저자는 이 책에서 권력이 무력(無力)함, 권위, 위계질서, 두려움 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정치 이외의 또 다른 권력자들, 즉 기업 경영진들의 권력남용을 예로 들어 권력남용의 형태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고,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권력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미래의 리더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
인간은 권력의 획득, 유지, 확대를 추구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즘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정당화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의 권력에 대한 집착에 아무런 윤리적 고삐도 채우지 않는다면 권력은 이제까지의 인류역사가 보여주듯이 정신적·물리적인 살인병기로 둔갑할 위험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권력은 위험하다.
그러나 권력이 양날의 검처럼 위험하다고 해서 백안시할 수 있을까?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있을까?
실제로 사람들은 보다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매일매일 투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권력은 위험하지만 우리에게서 떼어내기 힘든 그 무엇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이것이다.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겪을 위험을 피하고, 그 권력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 자연, 우주에 대해 안전하고 유익하도록 권력이 행사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을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권력은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의미했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항상 타인에 대한 착취를 의미한다.
하지만 미래에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미래의 지도자는 조직의 구성원을 '거느리는' 사람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미래의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되, 과시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게 구성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꼭대기에서 '고독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구성원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할 것이다.
그렇다. 미래의 지도자는 권력의 속성과 남용되었을 때의 파괴력을 분명히 인식하고, 권력의 크기만큼 책임감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분명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탑 공사가 시작된 직후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에펠탑은 샹 드 마르스에 세워질 예정으로, 거기서 온 파리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샤를 가르니에를 위시한 파리의 많은 유지들은 이 '괴물'이 경관을 망치게 되리라는 생각에 경악했다.

300미터 탑에 대응하여 300인 위원회가 재빨리 결성되었고, 그 명단에는 파리의 가장 유명한 화가, 음악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르니에가 이끄는 이 위원회는 박람회 집행 감독에게 '예술가들의 항의 서한'을 보냈다.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그에게 가능한 가장 강력한 언어로 "쓸모없고 흉측한 에펠탑"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경고를 보냈다.

그런 흉물이 "거대한 시커먼 공장 굴뚝"처럼 우뚝 서서 파리를 내려다보게 된다면 파리의 망신이요 재난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가르니에와 에펠은 니스의 거대한 천문대를 함께 만들어 사이좋게 작업했었고, 그 전해에 천문대는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물론 에펠은 자기 몫의 작업에 강관을 사용했는데, 가르니에는 강철을 골조의 자재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적 재료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탑 공모전에서 에펠의 경쟁자였던 쥘 부르데와 마찬가지로 가르니에도 의문의 여지 없이 전통적인

사람으로, 석재를 완벽한 건축자재로 선호하는 터였다.

더구나 자신과 부르데가 건축가라면, 에펠 같은 엔지니어는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 줄 모르는 '일개' 기술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니에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은 에펠탑이 박람회의 하이라이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가르니에에게 울화를 안긴 것은 아마도 그 팀이 자신이 박람회에 출품한 '인간 거주의 역사'를 무색하게 만들리라는 전망이었다.

혈거시대부터 페르시아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주거 역사를 보여주는 서른 개 이상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비교적 수수해서, 가르니에의 예상대로 박람회가 끝나자 철거되었고 사실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에펠은 가르니에를 필두로 한 300인 위원회의 항의에 위엄 있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물론 엔지니어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반면 작가나 예술가의 심미적 취향이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엔지니어들의 작업 토대가 되는 자연법칙들의 아름다움과,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설계의 조화를 굳게 신봉하고 있었다.

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석조물만이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와 그의 악명 높은 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터이며, 이제 그는 그 점을 증명하기에 나섰다.

 

1887년 7월, 에펠의 탑은 실제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첫걸음을 떼어놓기 위해 그와 근처의 르발루아-페레 공장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전 사업들에서도 그랬듯이 에펠은 먼저 탑의 각 부분의 자세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부분들에 대한 중력과 바람의 영향을 세밀히 계산하게 했다.

그런 다음 각 부분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관리된 - 리벳 구멍 하나도 10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하게 뚫린 - 자기 작업장의 환경 속에서 개별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부품들을 관리 가능한 부분들로 미리 조립했으니, 에펠의 주장에 따라 현장에서는 드릴을 쓰거나 두드려 맞추는 작업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어떤 부품에 하자가 있으면 작업장으로 돌려보냈다. 통틀어 1만 8펀 개의 미리 조립된 부분들이 현장으로 배달되어, 일종의 거대하고 완벽한 이렉터 세트[집짓기 장난감] - 이 고전적인 조립식 완구는 사실상 에펠의 유명한 방식이 기초하여 고안된 것이다 - 를 이루었다.

 

pp.302~304.

 

 

모든 것이 상관없다. 왜냐하면 포퓰리스트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잘 먹히는 전투 언어이자 도발 언어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음모론적 환상은 정치적 올바름의 지배를 조장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이 지배라는 유령은 사회를 금지와 소수자의 권리로 노예화한다.

이런 음모론을 통해 적의 구성이 가능해진다.

이제 적들의 이 과감한 행위에 맞서야 한다.

 

이것은 '좌파에 의한 표현의 독재'라는 자립적인 환상에 대한 방어다.

이 개념은 우파 포퓰리즘이 공적 담론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바꾸고 훼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우파 포퓰리즘은 공적 담론의  공간을 증오, 히스테리, 편집증에서 나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여기에서 개방이라는 단어는 약한 단어다.

 

실제로는 빗장을 풀어 버렸다는 데 가깝다.

담론의 공간은 무절제해졌고, 이를 통해 손상되었다. 공적 담론의 영역은 매우 연약하기 때문에, 담론 공간은 물론 그 안에서 나온 발언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익 포퓰리즘은 말할 수 있는 경계를 밀어젖혔을 뿐만 아니라, 제어받지 않는 공격성에도 문을 열어 주었다.

공격성에는  무대를, 감정의 공간을 제공했다.

증오는 인터넷 게시글이라는 새로운 전장에서 흘러나온다.

분노는 오래전에 익명이라는 보호를 떠나 숨김없이 완전한 실명으로 햇살 아래 나왔다.

틈새를 벗어나 점점 더 원을 넓히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개념의 재기호화라는 거대한 수술을 통해 가능해진 일이다.

우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규칙이 도덕의 독재로 거부될 때,  공적 공간은 문명화 기능을 잃어버린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가치와 태도가 '좌파의 도덕 테러'로 칭해질 때 르상티망resentment은 

공적 영역에 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합리적 증오가 시작된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르상티망을 거침없이 누릴 수 있다.

올바르지 못한 증오를 부끄러움 없이 공적 공간에서 표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릇된 행동이 오히려 '정당화'된다.

편견과 증오의 인터넷 게시물들이 더 이상 옳지 않은 일이 아니라 '정당한' 일이 된다.

이 행동들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표현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적 저항으로서 '정당화'된다.

 

이렇게 금기 깨기가 격렬한 정치 저항이 된다. 정치적 올바름이 유약한 공적 공간의 방어물이자 강화재로 설치해 둔 빨간 선을 넘어서는 일이 해방을 위한 공격이라는 환상이 된다.

증오를 발산하는 게시글은 반항으로 이해되고, 우파 작가들은 커다란 환호 속 자신들의 과대 성장을 영웅적 행위로 연출하고, 성공한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은 반란자와 박해자의 모습으로 치장한다.

 

금기시 된 것을 발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영웅이라는 부가 가치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 억압을 느끼는 사람은 고삐 풀린 박해받는 위치와 영웅의 위상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재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그리고 부가 가치를 생성하기 위한 포스트영웅주의 시대의 영웅주의다.

 

pp.261~264.

 

 

순수하게 베풀고 따지지 말라

 

施恩者, 內不見己, 外不見人, 即斗粟, 可當萬鍾之惠;

利物者, 計己之施, 責人之報, 雖百鎰, 難成一文之功.

 

순수하게 베풀고 따지지 말라

은혜를 베푼 사람이 안으로 자기에게 드러내지 않고 밖으로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면 좁쌀 한 말을 베풀었더라도 일만 섬을 베푼 은혜와 맞먹는다.

세상을 이롭게 한 사람이 자기가 베푼 시혜를 계산하여 남에게 보답을 채근한다면

수백 냥을 베풀었더라도 한 푼을 베푼 은공에 미치지 못한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세상을 이롭게 한 행위는 아름답고 숭고하다.

다만 순수하게 베풀고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진정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다. 은혜를 베풀고서 베푼 행위에 대한 자각도 하지 않고 남에게 티도 내지 않는다면 베푼 양이 아무리 적더라도 큰 은혜를 베푼 만큼의 가치가 있다.

 

세상에 은혜를 베풀고 그 가치를 따져 보답을 챙기려 하는 이가 있다.

아무리 많이 베풀었더라도 이익을 얻기 위한 상거래일 뿐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베푼 은혜만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서로 처지를 바꿔 생각하라

 

人之際遇, 有齊有不齊, 而能使己獨齊乎?

己之情理, 有順有不順, 而能使人皆順乎?

以此相觀對治, 亦是一方便法門,

 

사람이 얻는 기회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나 혼자 좋은 기회를 독차지하랴?

자기의 심경이 편안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남더러 모두 편안한 심경이 되라고 하랴?

이처럼 상대를 살펴보고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면 그 또한 요령을 얻은 처세법이다.

 

남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위로하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고 남의 삶을 이해한다. 같은 세상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이 좋은 기회나 환경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을 흔히 본다. 그러니 나 혼자 좋은 기회나 환경을 독차지하는 것은 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지금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하지 말자.

 

심경이 편안할 때도 있고 사나울 때도 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심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남의 사나워진 심경을 너그럽게 이해하자.

이렇게 남과 나를 서로 견주어 보고 처지를 바꿔서 문제를 풀어간다면 처세의 요령을 잘 터득한 것이리라.

 

원문의 방편법문(方便法門)은 불교에서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임시변통의 편리한 방법을 뜻한다. 방편은 일시적으로 변통해서 쓰는 응용의 방법이란 의미다.

 

pp.134~!36.

 

 

오늘은 2019년 2월 4일 설날이다.

그리고 공휴일이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의 새해 첫날을 맞이한다.

하루는 양력 1월 1일이고, 다른 하루는 음력 1월 1일인 설날이다.

매년 맞이하는 음력 설날은 나에게 두 번째 기회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설날이 나에게 묻는다.

 

"양력 1월 1일은 당신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은 당신의 과거를 유기하고 새로운 당신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전혀 변할 가능성이 없는 당신을 위해 두 번째 기회를 선물하고 싶다.

2월 4일, 음력 설날이 진짜 시작이다.

당신은 이제 밤하늘의 달처럼 의연하게 혁신하겠는가?

 

오늘이 설날인 이유는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止], 나의 미래를 위한 한 가지 원칙[一]으로 새로운 시작을 경주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새해 첫날, 내 삶을 위해 선택해야 할 한 가지 원칙은 무엇인가?

 

내가 탄 나룻배는 작은 외부 충격에도 출렁거린다.

수상스키어들이 만들어낸 잔잔한 파도에서 이 작은 배는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함선은 언덕만 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어 자신이 가야 할 항로를 유연하고 거침없이 항해한다.

 

왜 함선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까?

함선이 나룻배보다 커서일까?

그 이유는 크기가 아니라 함선이 장착한 특별한 장치 때문이다.

바로 '안정장치(安定裝置)'다.

이 장치는 자동차와 비행기에도 장착되어 안정된 운행을 보장한다.

 

인생이라는 항해에는 화창한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다.

인생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폭풍우는 인간의 인종, 학력, 성별, 빈부, 지위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엄습한다.

 

어떤 인간도 인생의 항해에서 맞닥뜨리는 폭풍우를 근사하고 우아하게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위기에 대한 반응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 반응은 어디서 배워야 할까?

그런 멘토는 어디에 존재할까?

철학자나 종교 지도자들을 찾기라도 해야 할까?

 

기원후 2세기,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일상에서의 사건들을 '판타지아(phantasia)'라고 명명한다.

판타지아는 우리의 감정을 현혹시키는 허상들이다.

인간은 대개 판타지아와 마주치면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른다.

우리 대부분은 이 판타지아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되어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운명은 판타지아와 마주쳐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혹은 무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마음, 즉 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에펙테토스는 '의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처음 사용한 그리스 단어 '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라고 명명한다.

그는 『참회록』(1.18.21)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난공불락인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설날은 또 다른 시작이다.

나는 앞으로 불가피하게 몰려올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파도와 판타지아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나는 인생이라는 항해를 위해 나만의 안정장치를 장착했는가?

나는 주변의 판타지아와 상관없는 난공불락의 의지, 즉 나만의 프로하이레시스를 내 마음속에 장착하고 있는가?

 

pp.157~161.

 

 

다시 말하면, 과학자들은 정교한 헛소리 탐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논문 발표 절차를 맹목적으로 추종함으로써 헛소리들의 영향력에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왔다.

다행인 것은 이 시스템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점이다.

베를린에 있는 막스플랑크 인간발전연구소Max-Planck-Institut für Bildungsforschung의 율리아 로러Julia Rohrer는 실험 데이터에 관한 연구자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때 이를 좀더 손쉽게 보고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녀가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자신감 상실 프로젝트Loss-of-Confidence'다.

 

그 덕분에 이제 연구자들은 전에 자신들이 직접 수행한 어떤 연구 결과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경우 그 이유를 일정한 양식에 기입해 공지할 수 있게 됐다.

특정 연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것을 직접 수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연구자 자신이라는 것이 그녀의 논리다.

로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과학 분야에서 수행하는 '자기수정self-correction'의 '자기'에 본래 모습을 부여했다.

그럼으로써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하고자 하는 후속 연구자들에게 투명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과학 논문 출판과 관련한 전통적 제약 요건들이 완화되면서 온라인을 통한 데이터와 코드 공유에 연구자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주장에 대한 다른 연구자들의 조사와 테스트가 표준적 동료 평가 절차의 일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실험 동기와 예측의 개요를 담은 문서에 '시간 도장time-stamp'를 찍어 업로딩 - 이른배 예비 등록 - 하면 과학자 스스로 정직성을 유지할 수 있고, 별난 연구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내는 수고도 덜 

수 있다.

연구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연구자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덜 유능하다고 생각하기보다 더 책임감 있고 개방적이라고 평가하는 긍정적 반응이 주류를 이룬다는 고무적인 데이터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측 시장prediction markets'을 만들려논 노력도 구체화되고 있다.

예측 시장이란 재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연구 결과에 연구자들이 베팅하는 시장이다.

'사회과학 재현 프로젝트Social Sciences Replication Project' 팀이 만든 주식시장의 경우, 검토 대상에 

오른 연구 결과의 주식을 예상되는 재현 가능성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고팔게 되어 있다.

최소 베팅 금액은 100달러이고, 반복 실험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진 연구 결과에 건 베팅 총액에 따라 각 참가자의 최종 수익이 결정된다.

 

각각의 연구에 걸린 베팅 액수를 보고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과학계가 어느 정도의 메타 지식meta-knowledge를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다.

이 시장은 어떤 연구가 탄탄한 연구로 판명될지 아닐지 예측하는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잘 수행하고 있다. 

거래 참가자들은 특정한 통계 결과의 약점이라든가 적은 표본 수 같은 연구의 특징을 베팅에 활용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반드시 출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으로는 독자들이 조용히 의문을 제기살 수 있는 특징들 말이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집단적 메타인지는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강력한 은유로 과학 발전의 역설을 꼬집은 바 있다.

우리가 가진 과학적 지식의 총량을 하나의 풍선이라고 가정한다면 바람을 불어넣을수록 풍선 표면이 

확대되어 풍선 바깥의 미지의 것들과 닿는 부분도 커진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아진다.

그럴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자기인식에 크게 좌우된다.

특정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힘을 판단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들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가리켜 스튜어트 파이어슈타인 Stuart Firestein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저급 무지'와 구별하기 위해 '고급 무지'란 표현을 쓰고 있다.

그는 "과학을 추진하는 동력이 무지에서 온다면... 데이터에 보이는 정도의 관심과 생각을 무지에 쏟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pp.21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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