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만 - 체인지體仁知
위기가 찾아올수록 위기의 본질을 파고드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통념을 깨고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봐야만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본질에 대한 각성은 스스로 새로운 준비에 나서도록 한다.
문제는 눈앞에 놓인 오르막길을 오르기만 할 뿐, 나중에 내려갈 생각은 미리 하지 않는 데 있다.
오르막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내리막을 만나면, 허무하고 허탈해진다.
다시 한 번 정상을 바라본다.
가슴이 아프다. 저곳에 오르기 위해 고생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려가야 한다.
지금 당장 내려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과거를 찬양하며 현실에 불만을 토로해봐야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더욱 멀어질 뿐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과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성공 체험에서 벗어나 지금의 위기 상황을 탈출하도록 도와줄 내면적 성찰이 필요하다.
언젠가 <포스코신문>에 '오르락樂 내리락樂'이라는 글이 실렸다.
오르는 기쁨에만 심취하면 내리막길로 추락하는 절망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오르막의 즐거움과 더불어 내리막의 즐거움을 맛보려면 '내려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요즘 출간되는 모든 자기계발서는 어떻게 하면 빨리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대별 성공하는 처세법, 단기간에 주식이나 투자 등을 통해 일확천금을 버는 법 등 한결같이 올라가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들이 출판계의 대세다.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오름 중독증 환자들, 그렇게 오르려다 실패하고 좌절한 청춘, 아예 오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절망적인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겨 살다 중년을 맞이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 또한 요즘 출판계를 이끌고 있다.
위로와 격려, 배려와 사랑은 필요하다.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오르려다 실패하고 바닥에서 절치부심하다 다시 기회를 잡아 오르고 또다시 장애물을 만나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 아니던가.
오르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올라갔더라도 언젠가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
올라가는 연습만 해서 마침내 성공한 사람은 자화자찬으로 포장된 가식으로 자신의 내면을 가리기 때문에, 자만심만 키우게 된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갑자기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그런데 올라가는 연습과 동시에, 기회가 될 때마다 내려가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언제든지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주어진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인다.
바닥으로 내려간다고 너무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형국이면 아무리 발버둥치고 온 힘을 다해도 이미 어쩔수 없는 난국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힘을 빼야 다치지 않고 바닥에 안착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바닥에서 느끼는 정직한 절망이다.
정직한 절망만이, 바닥에서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을 꽃피울 수 있다.
《체인지體仁知 p.40~42》



인생을 사는 데는 여섯 가지 끈이 필요하다.
이 여섯 가지 끈은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고, 삶을 변화시키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준다. 그렇다면 어떤 끈을 갖춰야 할까?

첫째, 매끈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매끈은 매력이 넘치는 끈이다.
이리 봐도 매력적이고 저리 봐도 매력적이다.
외모도 매력적이지만 내면의 마음은 더욱 끌린다.
매끈한 사람은 옷도 대충 입지 않고 언제나 세련되게 입는다.
항상 밝게 웃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예의바르게 행동한다.
무엇보다 매끈한 사람은 성품이 매끈하다.
 

둘째, 때로는 참지 않고 발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발끈은 오기에서 나온다.
불의를 보면 참지 말고 과감하게 행동하자.
하지만 아무 때나 발끈하며 화내면 곤란하다.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 남을 괴롭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만 참지 말고 발끈 화를 내자.
그리고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지자.
 

셋째, 화끈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매사에 우유부단한 사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사람이 되지 말자.
자신만의 색깔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화끈한 사람이 되자.
화끈한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화끈하게 하자.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화끈한 사람이다.
 

넷째, 후끈 달아오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화끈이 활활 타오르는 화력[火力]이라면 후끈은 참고 있다가 때가 되면 힘을 보여주는 저력[底力]이다.
화끈이 밖으로 드러나는 강렬함이라면 후끈은 보이지 않는 숨은 은근함이다.
후끈 달아오르는 사람은 달아오를 때까지 조용히 자신을 기다린다.
내면은 이미 타오르고 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은근과 끈기로 버티는 후끈 달아오르는 사람이 되자.
 

다섯째, 질끈 눈감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질끈 눈감아주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너그러운 사람이다.
실수나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상대의 약점과 실수는 눈감아주고 상대의 장점과 잘한 일은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해주자.
질끈 눈감아주는 사람이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여섯째, 마음이 따끈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매사를 이해타산으로 계산하는 차가운 사람보다 내가 손해를 봐도 된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따끈한 사람이 되자.
인간에게서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져야 제맛이다.
내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따끈한 사람이다.
상대의 아픔과 슬픔도 나의 아픔과 슬픔인 것처럼 감싸 안아주는 따끈한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살맛나는 곳이 될 것이다.
《체인지體仁知   p.187~189》



미래를 위해 겨울눈을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철저하게 대비하는지를 알고 나면 참으로 숙연해진다.
나무는 삶의 교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혜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나무는 아주 오랜 기간 생존해오면서, 삶의 지혜를 온몸으로 터득하고 어떤 시련과 역경이 와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갖추고 있다.
 

자연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생명체들의 축제의 장이다.
자연에는 원래 그런 것이 없고, 당연히 존재하는 생명체도 없다.
모두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가장 먼저 소식을 알리는 꽃은 개나리와 진달래다.
개나리와 진달래는 추운 겨울 동안 완벽하게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린다.
겨울눈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낸 덕분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용히 준비한 결과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자연의 경쟁은 꽃이 만개하는 봄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봄 이전의 봄부터 여름까지 치열한 준비를 해야 진한 향기를 지는 아름다운 꽃을 봄에 피울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준비에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리를 자연은 잘 알고 있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은 추운 겨울이라는 시련과 역경이 오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꽃눈을 준비한 꽃이다.
긴 기다림 속에 언제 올지 모를 짧은 기회를 준비한다.
기다림은 길지만 기회는 짧은 순간에 지나간다.
짧은 순간, 순식간에 찾아오는 기회는 긴 기다림 속에서 인고의 시절을 보낸 덕분에 받게 되는 선물이다.
 

봄은 짧고 겨울은 길다.
짧은 봄을 준비하기 위해 긴 겨울의 준비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긴 겨울을 겨울잠으로 허비하고서 용솟음치는 새봄의 기운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겨울은 그저 움츠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간이 아니라, 폭풍전야의 전운이 감도는 치열한 준비기간이다.
 

마찬가지로 가을은 짧고 여름은 길다.
짧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긴 여름 동안 활화산 같은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
봄은 오행으로 보면 '목木'이다. 나무가 새싹을 틔우는 시기라는 뜻이다.
여름은 오행의 '화火'에 해당한다.
불같은 열정으로 신록을 우거지게 만들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와 함께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장마철의 두려움과 공포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시기다.
여름을 열정적으로 보내지 않고서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보통 준비기간은 길지만, 승리의 환호와 축제는 금세 끝난다.
준비기간을 짧게 하고 승리의 축배시간을 길게 잡으면 다음 승리는 곧바로 물 건너간다.
하지만 바닥에서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은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설혹 기회를 놓친다면, 준비기간에 자신이 보인 불성실한 모습을 탓하면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한다.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단번에 승부수를 던질 수 있다.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나뭇결에 따라 아름다운 대패질을 할 수 있다.
기다리는 시간에 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가 기다림의 끝에 맛볼 수 있는 승리의 맛을 결정한다.
《체인지體仁知   p.238~240》

 
군대에서 제일 높은 분이 오성 장군인 반면에,
인재가 갖출 조건으로는 육성 즉 정성精誠, 근성根性, 탄성歎聲, 감성感性, 지성知性, 야성野性, 이렇게 6가지

 

‘체인지(體仁知)로 체인지(change)하라!
1. 체(體) - 몸을 움직여 체득한 것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주관적 체험이 객관적 경험보다 힘이 세다.
생각의 ‘발로’는 ‘발로’부터 시작된다.
‘반복’은 어느 순간 위대한 ‘반전’을 일으킨다.
당신의 미래는 고진감래인가, 고진통래인가.
꿈을 깨야 꿈을 꿀 수 있다!

2. 인(仁) - 어진 생각과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운다!
다 ‘받아’주는 ‘바다’ 같은 리더가 필요한 이유.
‘텅 빈 오만함’에서 ‘꽉 찬 겸손함’으로
성공하는 남자와 여자의 열 가지 조건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비웃음’을 극복해야 ‘비상’할 수 있다.


3. 지(知) - 체험적 지혜와 공감으로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다!
‘절박’해야 ‘대박’을 낳는다.
한 우물만 파다가는 매몰될 수 있다.
정상에 선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비전의 네 가지 종류.
굳은 머릿속에 낯선 생각의 씨앗 심기.
‘경계’를 넘어서야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공적과 학문이 없어도 떳떳한 사람이다

 

誇逞功業, 炫耀文章, 皆是靠外物做人.

不知心體瑩然, 本來不失, 卽無守功隻字, 亦自有堂堂正正做人處.

 

공적과 사업을 과시하여 드러내고 학문과 문장을 현란하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깥 사물에 기대어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바탕이 맑고 순수하여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다면

설령 한 치의 공적이나 한 자의 학문이 없을지라도 본디 정정당당하게 사람 노릇 하는 것임을 모르는 자들이다.

위대한 업적과 거창한 사업으로 명성을 날리고, 뛰어난 학문과 문학으로 성과가 혁혁하여 이름 높은 이가 많다.

세상에는 또 각 분야에 많은 스타가 있다.

그 명예는 업적과 학문, 연예와 스포츠와 같은 바깥 사물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사람 자체는 아니다.

이름 없이 산다고 해도 저들의 화려한 명성이 주눅 들 필요가 없다.

업적 한 가지 없고, 글자 하나 몰라도 정정당당하게 멋진 인간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도 좋다.

마음이 순수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산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훌륭하게 사람 노릇하며 사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옷 속에 보물이 숨겨진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옷 속에 보물이 있는 줄은 모르고 허황한 명성에 현혹된 채 살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한가할 때 준비하고 바쁠 때 마음을 다스려라

 

忙裏要偸閒, 須先向閒時討個欛柄;

閙中要取靜, 須先從靜處立個主宰;

不然, 未有不因境而遷, 隨時而靡者.

 

바쁠 때라도 한가함을 즐기고 싶으면 한가함을 즐길 때 쓸 칼자루를 먼저 마련해 놓아야 한다.

시끄러울 때라도 고요함을 취하고 싶으면 고요함을 제어할 주재자를 먼저 세워 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환경의 영향으로 마음이 휘둘리거나 시간의 영향으로 몸이 휩쓸리게 된다.

아무리 바쁘더라고 한가로움을 즐길 여유의 시간을 마련하고 아무리 소란스럽더라도 고요하게 지낼 틈을 비워 둔다.

일에 치여 몸이 지치고 넋을 일치 않아야 심신은 건강을 유지하고 삶은 격조를 찾는다.

그러나 한가하고 고요한 시간을 만들고서 오히려 노고를 보상 받기라도 하려는 듯 쾌락을 즐기며 방종하게 보낼까 두렵다.

안식을 위한 자유의 시간, 낯선 환경에서 평정을 잃고 휩쓸려 가는 자가 많다.

그러니 한가한 시간에 방종하지 않도록 미리 마음의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혼자만의 시간에 동요하지 않도록 마음의 주재자를 미리 세워 둬야 한다.

안식의 시간을 잘 보내면 그 뒤의 삶이 윤택하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종한다면 그 뒤의 삶에 쇠퇴와 몰락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칼자루의 원문은 파병(欛柄)으로 지조나 마음가짐을 비유한다.

성리학자가 자주 쓴 말이다.

 

pp.336~339.

 

강세형 -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나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은 50대 초반의 어른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제법 즐거웠다.
이젠 나도 어디 가서 어린 축에는 끼기 힘든 나이가 돼버렸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막내의 기쁨.
"쪼그만 게 어디서!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어리다는 것으로 구박당해 보는 것도 얼마 만인지!
더 어린 척, 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는 막내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토록 제법 어린 내가 끼어서인지,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그분들의 젊은 날의 회상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튀어나온 화두.
 

"우리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돌아가며 이야기하기.
한 남자 분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 했다.
그때는 인물도 좋았고 공부도 잘했는 데다 촉망받는 야구선서였는지라, 여자애들이 하루에 한 명씩 와서 고백했다며, "그때 연애 좀 실컷 할걸! 공부해야 한다고 다 거절했다? 그때가 전성기였단 걸 알았으면 안 그랬을 텐데!"
 

한 여자 분은 대학시절을 꼽았다.
"남자가 끊길 날이 없었어요!"
언제나 나 좋다는 남자가 줄 서 있던 그 시절에 더 신중히 남편감을 골랐어야 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고, 다른 남자 분은 30대 초반을 전성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인정도 받았던 그 시절이 가장 열정 넘치던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장난 반, 진담 반처럼 진행되던 각자의 전성기 얘기.
그러다 눈길이 내 쪽으로 쏠렸다.
"너는? 너는 네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였던 것 같니?"
 

그때 나는 생뚱맞게도 며칠 전 보고 온 콘서트가 떠올랐다.
넘치는 에너지와 넘치는 재기, 넘치는 자신감과 넘치는 열정, 그의 무대를 보고만 있는 나조차 손끝이 찌릿할 정도로 그는,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다.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요."
함께 공연을 봤던 후배가 말했다.
"지금이 나의 전성기구나, 그도 느낄까요? 어떤 기분일까요? 우리한테도 올까요? 전성기란 것이 과연?"
자못 진지한 후배에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린 농담.
"지나가 버렸으면 어떡하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거면?"
그건 정말 농담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거라면, 그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너는? 네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냐니까?"
딴 생각에 대답이 늦어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
"아직... 안 온 것 같은데요?"
정적.
나를 빤히 보는 어른들 머리 위로 수많은 말풍선들이 떠 있는 느낌.
그리고 그 말풍선들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긋 느껴졌다.
'역시, 너는 아직 젊구나!'

하지만 나는 싫다.
언제나 과거의 추억만을 되새김하며 살고 싶진 않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하지만 내게는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바로 내 자신."
정체하고 있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꿈을 위해 사랑을 떠나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사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오십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 얘기다.
심지어 우리나라 드라마도 아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세상물정 모르는, 철 덜 든, 좀 모자란 사람으로만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지라도,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마흔이 돼도, 쉰이 돼도, 환갑을 지나 엄마 나이가 돼도, 지금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 전성기는 아직, 안 온 것 같은데요?"
 

그래야 또, 꿈을 꿀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더, 나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야 앞으로 또한 열심히, 잘, 살고 싶다는 열정이 계속될 테니까.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p.73~77》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는,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누군가를 부럽다 말하기 전에 혹 노력해봤는가.
지금의 나, 지금의 내 생활을 바꿔보려 노력해봤는가.
머리로만 말고 실천해 노력해봤는가, 정말 최선을 다해.
 

너무 쉽게 불평하고 포기하고 타인의 삶을 부럽다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사람인지라, 나와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백 걸음 달려야 겨우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두 걸음이면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
그래도 나는 그런 불평도 일단 백 걸음을 다 달린 다음에나 할 수 있는 것, 그래야 괜한 투정으로 비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조금 오만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죽을 만큼 노력해서 이룰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노력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라는 아직 젊은, 아니 아직 어린, 그래서 오만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힘들었으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
내가 나로 태어난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세상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찾아오는 재앙이 있다는 것.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그저 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재앙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도 세상엔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내게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지나칠 만큼 휘청거렸다.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것이, 평생 해독제를 찾아 헤맸으나 처음부터 해독제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듯 허탈했고, 그 허탈함 안에서 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끙끙거렸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고?
내가 헛소리하면서 살았구나.
인생은 그저 랜덤일 뿐이었는데, 나의 의지나 노력 따위와는 상관없이 랜덤으로 축복과 재앙이 배정되는데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 치열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끙끙거리던 어느 날, 멍하니 드라마만 보고 있던 내게 불쑥 찾아와준 말이 있었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할 수 있는 평온을 주옵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시고, 그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내게 찾아온 불행 앞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느라 바빠서,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들만 바라보며 자기 연민 떨어대느라 바빠서.
 

우리는 누구나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단,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조차 다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만 원망하며 사는 바보가 되지 않기를.
나는 그런,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p.218~221》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당장 5년 뒤 어떤 회사가 살아남을지, 어떤 회사가 흥할지, 데이터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데이터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을 벗어나는 영역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데이터의 가치를 알고 그 데이터를 활용하려고 노력하는 기업과 그러지 않는 기업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데이터가 필요 없었던 회사는 그 비중이 작아지거나 데이터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이 발전하더라도, 인간 고유의 의사 결정 영역은 일부라도 남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떤 결정을 하도록 만들지, 어떤 영역의 데이터를 학습하도록 할지, 이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 결정하는 영역이다.

그 의사결정의 기준은 인간이 부여하는 '데이터의 목적'이 될 것이다.

데이터는 수단일 뿐이다. 데이터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미 데이터는 세상에 넘쳐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공공 데이터와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액티브 데이터가 흩뿌려져 있다.

데이터의 목적을 설정하지 못한다면 발전하는 기술 속에서 어떤 데이터를 가치 있게 활용해야 할지 모른 채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아이언맨'이 프로그램인 '자비스'에게 말 한마디로 업무를 지시하듯, 코딩 교육조차 필요 없는 시대가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한문장으로 정리하는 역량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 분석이 왜 필요한가? 그 데이터가 왜 필요한가? 이 데이터를 참고삼아 기업과 개인이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가?

그 방향의 끝엔 무엇이 있는가?

오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데이터로부터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 빅데이터가 가져올 미래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큰 데이터든 작은 데이터든, 뚜렷한 목적을 가진 데이터만이 시장에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목적이 있는 데이터만이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로 인해 기업이 존립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2019년의 데이터 이야기가 얼마나 오래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데이터가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래도록 기억했으면 한다.

사람을 위해 데이터가 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pp.256~258.

 

팔일(八佾) 1章 - 팔일무어정(八佾舞於庭)
사람은 조직이나 사회나 집단유지를 위한 질서를 위해, 자기의 지위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공자께서 계씨를 두고 평하셨다. (천자의) 팔일무를 뜰에서 추니, 이 일을 차마 한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 佾: 춤출 일, 忍: 차마할 인, 참을 인, 孰: 누구 숙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Confucius said of the head of the Chi family, who had eight rows of pantomimes in his area, "If he can bear to do this, what may he not bear to do?"
*pantomime: 무언극, 공연극,
《해설》
☞ 지위와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계씨(季氏)는 노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이다. '일(佾)'은 춤출 때 줄을 맞추는 열(列)을 말한다. 당시에는 지위의 고하에 따라 춤을 추는 인원이 엄격하게 차등을 두었는데 열의 수에 따라 인원도 달랐다. 천자(天子) 앞에서 추는 춤은 8열이고 그 아래 제후(諸侯)는 6열, 대부(大夫)는 4열, 사(士)는 2열 등으로 편제되며, 각 열의 인원수는 그 열의 수와 같도록 되어 있어서 천자의 경우 64名(8열×8명), 제후는 36名(6열×6명), 대부는 16名(4열×4명), 사는 4名(2열×2명) 등으로 이루어진다.
고대에는 예(禮)와 함께 악(樂)을 치세(治世)의 근간으로 삼았다. 악(樂)은 지위를 대표하여 눈에 보이게 표면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행사로서 다루어졌고, 지위에 따라 악기의 수나 춤추는 무용수의 숫자에 차이를 두었던 것이다. 공자께서도 잠시 벼슬을 할 때 예악을 먼저 세우는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계씨는 대부의 신분으로 4열 16名의 제한으로 '사일무(四佾舞)'를 추도록 해야 하는데, 천자와 같이 팔일무를 추게 했으니 비록 대부라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무도한 행동인가를 꾸짖는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계손씨가 비록 권세가 높다고 해서 지위에 따른 규율을 어기고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부모와 군주를 시해할 정도의 매우 큰 죄도 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그런 정도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차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고대이든 현대이든 사회에서나 조직에서나 구성원간 집단유지를 위한 질서는 필수적이다. 그 질서에는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서 행동해야 할 어느 정도의 선이 있고, 또한 지위에 따른 행동상의 제약도 있게 마련이다. 그 정도와 제약을 넘어서는 행위나 마음을 먹는다면 집단의 질서는 혼란스럽거나 균열이 가면서 심하면 유지되기 어렵게 된다. 사소한 일이라 할 지라도 그런 행위를 위한 마음가짐 자체가 큰 댐을 무너뜨리는 작은 균열과 같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일이 아닌 것이다.

팔일(八佾) 2章 - 삼가자이옹철(三家者以雍徹)
지위에 맞게 처신하고 행동하라..
三家者以雍徹.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삼가자이옹철. 자왈: 상유벽공, 천자목목, 해취어삼가지당?)
삼가에서 (詩經의) 옹장(雍章)을 노래하면서 철상을 하였는데, 공자께서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제후들은 제사를 돕고 천자는 엄숙하게 계시네'라는 가사를 어찌해서 삼가의 당에서 취하여 쓰는가?
* 雍: 화할 옹, 徹: 거둘 철, 相: 도울 상, 서로 상, 辟公: 제후, 穆: 심원할 목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three families used the Yungode, while the vessels were being removed, at the conclusion of the sacrifice. The Master said, "'Assisting are the princes;-the son of heaven looks profound and grave';-what application can these words have in the hall of the three families?"
* vessel: 그릇(용기), profound: 엄청난, 심오한, grave: 근엄한
《해설》
☞ 지위와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2)
삼가(三家)는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의 세 집안을 말한다. 옹(雍)은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을 말하며, 철(徹)은 제사를 마치고 제기를 거두는 것이다. 천자(天子)의 종묘제사에서는 제사를 마치고 제기를 거두어 들일 때 옹장(雍章)을 노래하는데, 천자도 아니고 제후도 아닌 대부의 신분으로서 세 가문이 감히 참람하게도 옹(雍)을 노래한 것을 비난하는 장면이다.
앞장에서 노나라 대부 계손씨의 신분에 맞지 않는 팔일무 행사를 비난하였는데, 노나라는 계손씨 뿐만 아니라 맹손씨와 숙손씨도 대부의 신분을 넘어서 당시 주(周)나라 천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시경의 주송을 감히 사용함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노나라의 대부들이 천자의 예악을 사용하게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주(周)나라는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난 후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데 어려움이 컸다. 초창기에 '형제의 난'이라 할만한 대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나라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분봉(分封)'이라는 제도가 생겨났고 제후국이 성립되었다. 즉 중앙의 천자국과 지방의 제후국이라는 역사에서 말하는 봉건(封建)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 중에 주공(周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공의 형은 무왕(武王)으로 주나라 두번째 제위에 올랐던 인물이었고, 무왕이 죽은 뒤 성왕(成王)이 제위에 오르자 숙부인 주공이 섭정(攝政: 어린 성왕을 대신해 정사를 맡아봄)이 되었다. 주공이 섭정이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주공의 동생이자 성왕의 작은 숙부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등이 은(殷)나라의 마지막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결탁하고 동이(東夷)를 끌어들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주공은 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였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대반란이 진압되고 난 뒤 은나라 원주민들과 동이족(東夷族)을 통치하기 위해 주나라 친족 및 공신들이 각지에 제후국으로 분봉(分封)되었는데, 이 때 주공은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산동지역 곡부(曲阜:취푸)에 분봉되었고 노(魯)나라가 되었다. 노나라는 중국에서 가장 문물이 풍성한 지역을 터전으로 한 금싸라기 땅을 분봉받은 것이다. 주공은 수도에 남아서 섭정을 계속하고 자기 아들인 백금(伯禽)을 보내 통치하게 하였는데, 후에 주공이 죽고 나서 성왕은 주공의 공(功)을 생각해 백금으로 하여금 천자의 예약(禮樂)을 쓸 수 있게 허락하였다.
노나라는 황금지역을 분봉받고 또한 천자의 배려로 천자의 예악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제후국 중에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여 대부들까지 감히 천자의 예악을 행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공자께서 신분에 어긋나는 행위를 비난하게 된 것이고, 군신관계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는 유학의 입장에서 노나라 대부들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 동이(東夷): 중국 상고사에서는 동이족(東夷族)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이 자주 보인다. 동이족은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한반도內 보다는 중국의 동쪽 해안가를 둘러싼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산동반도의 풍부한 곡창지대와 발해만을 중심으로 중국학계에서 지칭하는 '환발해권(環渤海圈)' 문화를 이루며 하나라 및 은나라와 주나라 등의 중원지역 상고시대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오랫동안 커다란 세력으로 명맥을 유지했던 것이다. 동이족 문화의 중심은 중국동북지역 요녕성 일대에 있었던 역사상의 '고조선(古朝鮮)'이다. 고조선과 중국땅의 동이족은 문화적 연대를 통해 연계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중심지를 잃은 중국내 동이족들은 세력이 약해져 점점 중국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들의 대거 이주와 함께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팔일(八佾) 3章 - 인이불인(人而不仁)
"사람이 되어서 어질지 못하면, 예를 지켜서 뭐 하겠노? 또 음악을 하면 뭐 하겠노?"
이번 논어 학습에서는 '인(仁)'과 '인정(人情)'에 관한 내용입니다.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자왈: 인이불인, 여례하? 인이불인, 여낙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仁하지 못하면 禮를 어떻게 하며, 사람으로서 仁하지 못하면 樂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如何: 어찌 하겠는가, (如何禮, 如何樂의 도치법 표현)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If a man be without the virtues proper to humanity, what has he to do with the rites of propriety? If a man be without the virtues proper to humanity, what has he to do with music?"
《해설》
☞ 일이든 사람이든 인정(人情)으로 대하자
"사람이 되어서 어질지 못하면, 예를 지켜서 뭐 하겠노? 또 음악을 하면 뭐 하겠노?"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이 인(仁)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람을 짐승과 같은 미물과 구분하는 것으로 仁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인(仁)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理致)를 말하며 그 바른 이치를 잃게 되면 질서가 없어지고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사람의 마음(심성)이 없어진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질서를 상징하는 예(禮)와 조화를 상징하는 악(樂)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질서와 조화를 파괴하는 사람은 인(仁)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 장의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 등에 대한 사례에서 질서를 무시하는 인(仁)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악(禮樂)을 할 자격이 없음을 지적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인(仁)'이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이(二)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형성자이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냄을 뜻하는 데서 '어질다'의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공자(孔子)께서 특히 인(仁)을 도덕의 중심으로 삼은 후로는 자신에게는 엄하게 하지만 남에게는 어질게 하는 정신을 인(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학의 '인(仁)'의 정신 이전부터 '인정(人情)'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을 인정(人情)이라고 하는데, 말에서 풍겨 나오듯이 차갑고 나쁜 마음보다는 따뜻하고 좋은 마음을 의미한다. '정(情)'이라는 글자는 '마음(忄=心)'과 '푸르름(靑)'의 함성어인데, 맑고 깨끗한 푸른 마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즉 순수하게 타고난 성질 그대로의 사람의 마음이 '정(情)'인 것이다.
그런데 유학이 들어오고 나서는 '정(情)'자와 같은 글자인 '성(性)'자가 함께 '성정(性情)'이라 쓰이면서, 타고난 성질을 성(性)이라 하고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감정을 정(情)이라 하여 구별하게 되었고 '정(情)'자의 본래 의미도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 '정(情)'과 구별하여 '인정(人情)'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인자(仁慈)하고 겸손(謙遜)하고
의리(義理)있고 성실(誠實)하고
마음을 비우고 남을 공경(恭敬)하고
덕으로써 안아 주고 온정으로써 살아가면
하늘과 땅이 감탄한다."

팔일(八佾) 4章 - 임방,문례지본(林放,問禮之本)
'형식보다는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林放 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임방 문례지본. 자왈: 대재문, 예여기사야, 영검, 상여기역야. 영척.)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질문이여.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고, 상(喪)은 형식적으로 잘 다스려지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
* 奢: 사치할 사, 寧: 차라리 녕, 易: 다스릴 이, 쉬울 이, 戚: 슬플 척, 친척 척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Lin Fang asked what was the first thing to be attended to in ceremonies.
The Master said, "A great question indeed! "In festive ceremonies, it is better to be sparing than extravagant. In the ceremonies of mourning, it is better that there be deep sorrow than in minute attention to observances."
* festive: 기념일의, extravagant: 사치스러운, spare: 여분의, mourning: 애도
observances: 의식
《해설》
☞ 형식 보다는 내면의 중요함
임방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예를 행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형식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예의 근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공자께 질문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형식적인 것만을 따르는데도 임방만이 유독 근본에 뜻을 두고 질문하였기 때문에 그 질문 자체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예(禮)를 잘 지키고 갖추려 하다보니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눈에 보이는 외형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치장하듯 나중에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잘 갖추려고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의 본질이 아니다. 그래서 예는 검소하면서 덜 갖추어짐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상(喪)이란 근본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 커서 슬퍼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되면 상을 치르는 사람이 몸을 상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슬픔에 겨워 끼니를 거른다든지 몇날 며칠을 혹은 몇 년을 슬픔에 잠겨 모든 생계를 놓아 버린다든지 하는 등이다. 그래서 상례는 날자와 의식에 한도를 정해 절제토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점차 그 의식자체에 집착하여 상을 형식적으로 잘 치르는 데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래서 상은 슬퍼하면서 덜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예의를 차린다는 것은 절차나 형식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하니 예의 근본을 생각하면 차라리 과한 것보다는 모자라는 게 낫다는 것이다. 모자라도 좋다는 의미에는, 형식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팔일(八佾) 5章 - 이적지유군(夷狄之有君)
'형식보다는 실질의 중요성'에 대한 공자의 말씀입니다.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자왈: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무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적(오랑캐)에게도 군주가 있으니, 제하(중국의 제후국)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 亡: 없을 무, 無와 통용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rude tribes of the east and north have their princes, and are not like the States of our great land which are without them."
《해설》
☞ 형식 보다는 실질의 중요성
중국은 춘추시대 이후에 '화이관(華夷觀)'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역사관을 정립하게 된다. 중국의 문명화된 화족(華族)과 변방의 원시적인 이족(夷族:오랑캐)으로 구분지어, 동쪽 오랑캐를 이(夷), 서쪽 오랑캐를 융(戎), 남쪽 오랑캐를 만(蠻), 북쪽 오랑캐를 적(狄)이라 불렀다. 그래서 우리 선조를 멸시하며 호칭했던 동이(東夷)를 비롯하여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오랑캐라 하면 당시에 왕도정치를 펼치는 군주제라는 정치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미개한 족속을 말한다. 중국 이외에는 제대로 된 정치체제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주변나라를 멸시하여 오랑캐라 불렀던 것인데, 이는 지극히 화족 중심의 세계관으로만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오랜 역사는 거의 이민족의 침입과 지배에 의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양상을 띠게 된다.
공자께서 당시의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태를 슬퍼하여 탄식하신 말씀이다. 오랑캐에게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군주가 있는데 하물며 중국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군주제도가 없을 정도로 군주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주들이 군주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공자가 활약하던 춘추시대는 주(周)나라 말기 제후들을 중심으로 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패권정치(覇權政治) 시대였기에, 군주를 중심으로 한 도리에 의거한 이상적인 도의정치(道義政治)가 펼쳐지지 못하였고 그러한 세태를 탄식하는 장면인 것이다.
본 장과 관련하여, 공자께서는 중국 땅에서의 도리가 펼쳐지지 못하는 현실을 탄식하면서 오랑캐라 멸시하던 동이(東夷) 땅에 가서 살고자 하는 대목이 《논어(論語)》 에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중국의 정통역사서인 25사(史) 중에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제75에 보면,
'東方曰夷..君子不死之國.. 故,孔子欲居九夷也'(동방왈이..군자불사지국.. 고,공자욕거구이야)
"동방을 이(夷)라고 부르는데 군자가 있어 죽지 않는 나라이라. 고로 공자께서 구이(동이는 9개 부족으로 구성)에 거하고자 하셨다" 라고 되어 있는데,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 6장에 '자왈, 도불행, 승부부우해(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하려고 하노니" , 〈자한(子罕)〉편 13장에 '자, 욕거구이 (子, 欲居九夷)', "공자께서 구이에서 살고자 하셨다"고 한 기록에 대한 역사적인 서술인 것이다.
공자께서 중국 땅에서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동이족의 땅으로 가서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심경을 고백한 내용인데, 당시 동이족은 공자가 부러워할 정도로 이미 도(道)가 펼쳐지고 있었던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옛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란 말로 부르게 된 전거가 바로 공자의 부러움에서부터인 것이다.
본장은 형식적으로 제도를 갖추었지만 실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게 보이더라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음만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팔일(八佾) 6章 - 계씨여어태산(季氏旅於泰山)
이번 논어의 주제는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鳴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계씨여어태산. 자위염유왈, 여불능구여. 대왈, 불능. 자왈, 명호, 증위태산불여임방호)
계씨가 (대부로서 제후의 예를 참람하여) 태산에 여제를 지내었다.
공자께서 염유에게 "네가 그것을 (바로잡아) 구할 수 없겠느냐?"고 하시자 염유가 "불가능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아, 일찌기 태산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다고 하느냐?"
* 旅: 산신제 지낼 려, 나그네 려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chief of the Chi family was about to sacrifice to the T'ai mountain. The Master said to Zan Yu, "Can you not save him from this?"
He answered, "I cannot." Confucius said, "Alas! will you say that the T'ai mountain is not so discerning as Lin Fang?"
* discern: 알아보다, 식별하다, 분별하다
《해설》
☞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라
여제(旅祭)는 산신제를 말한다. 당시에 산신제는 제후가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계씨가 권세만 믿고 대부(大夫)의 신분으로서 산신제를 지내니, 공자께서 제자이자 계씨의 가신이 된 염유에게 계씨가 예의에 어긋나는 잘못을 하지 않도록 바로잡으라고 주문하였으나 염유가 어찌할 수 없다고 답하자, 공자께서는 탄식하면서 임방을 추켜세우며 염유에게 다시 한번 권하고 있는 장면이다.
임방은 4장에서 등장한 노나라 사람으로, 예를 행하는 자들이 허례허식에 빠져 예를 잃은 것을 보고 예의 근본에 대해 공자에게 질문했던 공자의 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태산이 임방만도 못하다고 하느냐?"라는 공자의 말은, 태산의 산신령이 예의 본질을 따져 물을 만큼 예에 밝은 임방 보다 못하겠느냐는 것인데 산신제를 지내봐야 산신령은 예의에 어긋난 제사를 흠향할 만큼 예의에 어둡겠느냐는 뜻이다. 산신령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 계씨가 스스로 그만두게 하라는 공자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본 장이 인용된 고사가 보인다. 조선 태조 7년 경연에서 대신 이서(李舒)가 《논어(論語)》의 '계씨여어태산(季氏旅於泰山)' 장을 강론하자 시강관 유관(柳觀)이 "예(禮)에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강토 안의 산천에 제사 지내지만 노나라 계씨(季氏)가 태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니 공자가 이를 꾸짖었는데, 본조(本朝)의 재상이 명산에 제사 지내는 것은 예에 매우 어긋납니다" 라며 아뢰는 장면이 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온 잘못된 전통이니 금하여야 한다는 내용인데, 조선은 고려와 다르다는 조선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다.
본 장은 자기의 신분과 처지에 따르는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공자의 가르침이라 하겠다.

팔일(八佾) 7章 -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
"군자는 남과 경쟁하지 않지만, 활쏘기에서는 예외로 예의(禮儀)를 위해 경쟁한다."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자왈: 군자무소쟁, 필야사호! 읍양이승, 하이음, 기쟁야군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경쟁하는(다투는) 것이 없으나 반드시 활쏘기에서는 경쟁한다.
상대방에게 읍(揖)하고 사양하며 (사대에) 올랐다가 (활 쏜 뒤에) 내려와 (술을) 마시니 그러한 경쟁이 군자다운 것이라.
* 揖: 읍할 읍, 升: 오를 승, 되 승
Confucian Analect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student of virtue has no contentions. If it be said he cannot avoid them, shall this be in archery? But he bows complaisantly to his competitors; thus he ascends the hall, descends, and exacts the forfeit of drinking. In his contention, he is still the Chun-tsze."
* contention: 논쟁, 다툼, complaisantly: 공손하게, the forfeit of: ~의 벌로서
《해설》
☞ 결과에 대한 승부 보다는 절차에서의 공정성 중시
군자는 원래 무엇인가를 두고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는다.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첫 장에서부터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고 하였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적극 자신을 내세우고 홍보하기 바쁜 경쟁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군자의 태도가 맞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고 무한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경쟁상대로 여겨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군자도 활쏘기에서 만큼은 경쟁한다고 하였다. 군자가 활쏘기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활을 잘 쏘아서 남에게 이기는 차원의 경쟁이 아니라 활을 쏘기 위한 절차에서의 예절을 지키는 행위를 남과 경쟁한다는 것이다. 활을 쏘기 위해 사대에 오르기 전 세 번 읍(揖)하는 행위, 사대에서 내려와 상대를 기다려서 이긴 자가 읍하면 진 자로서 서서 술을 한잔 마시는 행위, 그러한 행위들을 예의로써 온화한 태도로 엄격하게 지키는 행위를 경쟁하는 것이다. 승부를 겨루는 소인(小人)들의 경쟁과는 다르다.
인사하는 예절 중에 몸으로 하는 인사예절로 세 종류가 있다. '입례(立禮)', '읍례(揖例)', '배례(拜禮)' 라고 하는데, 간략히 '입(立)', '읍(揖)', '배(拜)'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입례는 주로 밖에서 양손을 배 위에 맞잡고 서서 상체를 약간 구부리면서 인사하는 방식이고, 읍례는 반절이라고도 하며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는 방식이고, 배례는 큰절이라고 하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양손을 모아 팔(八)자형으로 하여 바닥에 짚고 무릎을 꿇어 얼굴이 바닥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구부리는 방식이다.
옛날 활쏘기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문무(文武)를 따지지 않는 누구나 익혀야 할 생활습속이자 중요하게 다루어진 오랜 전통이었다. 활을 전쟁터에서의 단순한 무기로만 여겼더라면 활쏘기가 그렇게 대단한 전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활쏘기를 통해 도리와 예의를 익히는 심신단련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활을 쏘는 행위에는 의미있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v 옛날의 활쏘기 시합은 엄격한 예의와 절차가 따랐는데,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전통 활을 '국궁(國弓)'이라 하고 활 쏘는 것을 '궁도(弓道)'라고 하여 궁도장에 가면 활을 쏘는 데 지켜야 할 도리로써 '궁도구계훈(弓道九戒訓)'을 익혀야 한다.

〈 弓道九戒訓(궁도구계훈) 〉
正心正己(정심정기) :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仁愛德行(인애덕행) : 어질고 사랑스럽게 덕스럽게 행동한다.
誠實謙遜(성실겸손) : 성실하고 겸손하게 생활한다.
自重節操(자중절도) : 스스로 신중하고 절도있어야 한다.
禮儀嚴守(예의엄수) : 예의를 엄격하게 지킨다.
廉直果敢(염직과감) : 청렴하고 곧으며 용감하게 행동한다.
習射無言(습사무언) : 활쏘기를 배울 때는 말을 하지 않는다.
不怨勝煮(불원승자) :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莫灣他弓(막만타궁) : 남의 활을 당기지 말아야 한다.
※ 활(弓)의 의미와 유래

'활(弓)'은 순수 우리 말이다. 최초 활의 발명과 관련된 의미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활이 효(孝)를 상징하는 도구였다. 오래 전 옛날에 죽은 망자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발명된 도구가 활이며 그로부터 나오게 된 말이 조문을 뜻하는 '조(弔)'라는 글자라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우리 민족을 옛부터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렸으며 '이(夷)'는 '큰 활(大弓)'을 뜻한다고 전해져 왔는데, 그만큼 활을 잘 다룬 민족이라는 뜻이 되겠다.
문명이 꽃피기 훨씬 오래 전 옛날에, 인간이 아직 동물을 사냥하는 수렵(狩獵)이라는 행위조차도 모르고 나무 열매나 따서 먹고 살던 채집(採集) 생활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땅에 매장하거나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나 짐승들이 시신을 뜯어먹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조장(鳥葬)이라 하여 새에게 시신의 살을 먹게 하는 풍속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호아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호아루는 평소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자(孝子)였다. 호아루도 마찬가지로 자기 아버지가 죽게 되자 들에다 시신을 버렸다. 하지만 자기를 낳아서 길러 준 아버지의 신체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돌을 던져서 짐승들을 쫓아내고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짐승들이 물러가지 않고 계속하여 틈만 있으면 다시 다가오니, 호아루는 돌을 던지는 힘을 덜 소모하기 위해 탄력성이 있는 나무를 땅에 대고 휘어서 그것으로 돌을 튕겨서 짐승을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무를 휘어 줄에 묶어 그 줄을 당긴 다음 곧은 나무가지를 걸어서 줄을 놓으니 그 곧은 나무가지가 날아가는 것이 돌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다. 그 때에 사람들이 호아루의 심성에 감동을 받아 그들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시신을 지키는 것이 풍속이 되었는데, 모두들 호아루가 만든 그 물건을 가지고 짐승을 쫓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호아루가 만든 것이라 하여 '호아루'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그 말이 줄어서 '활'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계기로 시신을 혼자 지키기 보다는 서로 지켜 주는 풍속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문(弔問)'이다. 조문(弔問)을 오는 사람들도 모두 그 활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망자의 시신을 같이 지켜 주게 되었는데, '조(弔)'는 활과 화살을 말한다. 호아루는 동이족(東夷族)의 먼 조상이며 우리 족속에게서 최초로 활이 나왔기 때문에 활의 제작에서부터 활에 관한 모든 것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족속들이 우리를 일러 '이(夷)'라고 불렀다.
활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면, 생활 풍속으로서의 활쏘기는 활의 기운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년 사계절 중 24절기(節氣)에 맞춰서 마을마다 대대적으로 활쏘기를 행하였다. 우리나라 활은 가슴을 활짝 열고 당겨야 하는데 그 때 갈비뼈가 좌우로 열리기 때문에, 24절기 날에 맞춰 활을 힘차게 당기면 계절 기운이 열려진 몸 속으로 들어와서 건강하고 좋은 기운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임신 전의 젊은 여성들은 활쏘기를 금하였는데 활의 기운으로 임신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임신이 더 이상 안되는 중년부인이나 임신이 필요없는 기생들만 활을 쏘게 했다고 한다.
참조 : http://www.samsung.net/blog/js64.kim.blog
위정(爲政) 21章 - 효우,역위정(孝友,亦爲政)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혹위공자왈: 자해불위정?
자왈: 서운: 효호유효 우우형제, 시어유정. 시역위정, 해기위위정?)
혹자가 공자에게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사를 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효(孝)에 대하여 말하였다. '孝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사를 하는 것이니, 어찌 (지위에 있어야만) 정사를 하는 것이 되겠는가?
* 奚: 어찌 해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Some one addressed Confucius, saying, "Sir, why are you not engaged in the government?"
The Master said, "What does the Shu-ching say of filial piety?-'You are final, you discharge your brotherly duties. These qualities are displayed in government.
This then also constitutes the exercise of government. Why must there be THAT-making one be in the government?"
[해설]
☞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최선
공자는 위대한 철학자이고 사상가였지만 그러한 철학과 사상을 현실세계에 접목시켜 볼 기회를 많이 갖지를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政治)와 정사(政事)를 담당하는 벼슬을 많이 하지 못한 관계로 제자들과 함께 여러나라를 주유(周遊)하며 도리(道理)에 대한 주옥같은 가르침을 펼치게 된 것이다.
당시는 혼란스런 정치상황과 사회변혁으로 불확실성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춘추 열국의 군주들은 정사를 펼치는데 있어서 다른 나라와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했고, 그래서 자기의 정치와 정사를 뒷받침해줄 사상가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도리(道理)와는 동떨어진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이상적인 도의정치(道義政治)를 수용하기에는 시대상황이 여의치 못하였던 것이다.
《서경(書經)》은 〈주서(周書) 군진편(君陳篇)〉을 말한다. "군진(君陳)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또 마음을 미루어 넓혀서 한 집안의 정사(政事)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효(孝)와 우(友)의 펼침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바로 집안전체에 바른 정사를 펼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나라의 바른 정사를 펼치는 격이 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의미와 같다.
누구나 자신의 직분과 본분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바로 사회와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된다. 정치와 정사 같은 어렵게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개인의 행위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잘하면 정사도 잘 되나, 내가 잘 못하면 정사도 잘 못 된다. 잘 한다는 의미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기초가 되는 처신을 바르게 잘 하는 것이다.

위정(爲政) 22章 - 인이무신,부지기가야(人而無信,不知其可也)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 小車無?, 其何以行之哉?
(자왈: 인이무신, 부지기가야. 대거무예, 소거무월, 기하이행지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신의가 없으면 그 가함을 알지 못하겠다. 큰 수레에 끌채 쐐기가 없고 작은 수레에 역시 끌채 쐐기가 없다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
* ?: 수레 끌채(멍에를 매는 부분) 끝 쐐기 예, ?: 끌채 끝 쐐기 월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I do not know how a man without truthfulness is to get on. How can a large carriage be made to go without the crossbar for yoking the oxen to, or a small carriage without the arrangement for yoking the horses?"
*yoke: 멍에(씌우다)
[해설]
☞ 사람에게는 신의(信)가 가장 중요하다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멍에와 멍에를 수레와 연결하는 수레채(끌채) 끝 쐐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듯이,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신의(信)가 인간사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信(신)은 人(인:사람)과 言(언:말)의 합자(合字)이다. 예전에는 사람인변(?=人) 부에 口(구)라 썼으며(?口), 또 말씀언변(言) 부에 心(심)이라 쓰기도(?) 하였다. 사람이 하는 말에 거짓이 없는 것을 뜻하고 그 말하는 바가 마음과도 일치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말은 거짓없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논어에서는 信(신)을 '말에 성실함이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사람과 짐승을 구별함에 있어서, "사람은 자고 먹은 자리를 치우지만 짐승은 자고 먹은 자리를 치우지 않는다" 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왔다. 이 또한 인간사에 있어서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로 자고 먹은 행위 이후에는 이부자리와 밥상을 부지런히 치우고 정리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부지런한 행동은 성실함의 최우선 조건이기 때문이고, 행동의 성실함은 마음의 성실함과 말의 성실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옛날의 수레(車)는 큰 수레(大車)와 작은 수레(小車)로 나뉜다. 큰 수레는 평지에서 짐을 싣는데 사용하며, 작은 수레는 사냥할 때 사용하는 전거(田車), 전투할 때 사용하는 병거(兵車), 일반 승용에 사용하는 승거(乘車) 등으로 구분되어진다.

위정(爲政) 23章 - 백세가지(百世可知)
子張問: 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자장문: 십세가지야?
자왈: 은인어하례, 소손익, 가지야; 주인어은례, 소손익, 가지야; 기혹계주자, 수백세가지야.)
자장이 "열 왕조 뒤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주나라를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백세 뒤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sze-chang asked whether the affairs of ten ages after could be known.
Confucius said, "The Yin dynasty followed the regulations of the Hsia: wherein it took from or added to them may be known. The Chau dynasty has followed the regulations of Yin: wherein it took from or added to them may be known. Some other may follow the Chau, but though it should be at the distance of a hundred ages, its affairs may be known."
[해설]
☞ 현재는 미래의 거울, 현재로 미래를 가늠한다
중국의 상고시대는 하나라(夏: 기원전2070~기원전1600경)에서 은나라(殷: 기원전1600~기원전1046)로 주나라(周: 기원전1046~기원전770)로 이어진다. 은나라가 이전의 하나라의 예(禮)를 물려받은 것처럼 주나라 역시 이전의 은나라로부터 예(禮)를 물려받았다. 하나라는 걸왕(桀王)이 미녀 말희(?喜)에 빠져 포악하고 학정을 일삼다가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토벌당하고, 은나라는 주왕(紂王)이 달기(?己)에 빠져 방탕하다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하나라 걸왕이 말희에 빠져 인공연못을 만들어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달아 숲을 만들어(以酒爲池懸肉爲林)' 방탕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고사가 나왔다.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데서 '진흙 수렁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란 뜻의 '도탄지고(塗炭之苦)'라는 고사도 또한 여기서 나왔다. 하나라나 은나라나 두 나라 모두 도리를 잃는 무도(無道)하게 되어, 즉 '예(禮)'를 잃게 되어 나라를 망하게 한 공통점이 있다. 그만큼 예(禮)는 한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게 하고 정당성을 부여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천지간 세상의 정해진 질서는 개인의 수신(修身)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평천하(平天下)까지 모두가 지켜야 할 도리로써 예(禮)의 근본이다. 시대가 변하고 나라가 변함에 따라 문물과 제도는 변혁을 이루지만 예(禮)는 나라가 바뀌어도 소멸되거나 변하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니 그 예(禮)를 통해 과거를 알 수 있고 마찬가지로 미래까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백세가 지나더라도 충분히 미래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주나라를 보면 후세가 계속되는 한 백세가 지나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세(世)'와 '대(代)'의 차이
'세(世)'는 본래글자가 '?(세)'로써 세 개의 十(십)을 이어 삼십 년을 가리키는 회의자(會意字: 둘 이상의 글자를 합쳐서 뜻을 합성하여 만든 글자)이다.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하였기에 '한 세대'를 의미하게 되었다. '대(代)'는 사람인변(?=人) 부(部)와 줄 달린 화살을 나타내는 글자 ?(익) 음(音)이 합하여 이루어진 형성자(形聲字: 두 글자를 합하여 새 글자를 만드는 방법으로 한쪽은 뜻을 나타내고 다른 쪽은 음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앞 세대와 뒷 세대 사이의 사람의 일생을 가르는 시간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원래 '세(世)'는 왕조가 바뀌어 하늘의 명(天命)을 새로 받는 데서 유래하였고, 그 천명을 받아 새 왕조를 연 사람을 '1세(一世)'라 칭했다. 그 이후 대체로 혈통에서의 순서(서열)를 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시조로부터 혈통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탄생하는 인물에 대한 순번을 정하는 단위가 되었다. '대(代)'도 원래는 '세(世)와 같이 세대간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었는데, 아버지와 아들간을 '1대(一代)'로 칭했다. 이후에는 혈통과 무관하게 직책이나 위치에 따라 임명된 순서를 나타내는 용어이자 단위로도 쓰임이 확대되었다. 무슨 1대 회장, 2대 회장 등의 사례와 같다.
현대에 와서는 자신을 1세(世)로 하여 후대로 내려가는 경우에는 '세(世)'를 쓰고, 윗대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대(代)'를 통상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족보에서는 세(世)가 대(代)보다 한 차수가 많게 되어 있다. 아래 표의 사례에서와 같이 이는 잘못 사용되고 있고 '세(世)'와 '대(代)'는 아래로나 위로나 동일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다만 '세(世)'는 후대의 시작이라는 본래 의미가 많아 '세손(世孫)'으로 많이 쓰인다.

서열 틀린 사용(1) 바른 사용(1) 틀린 사용(2) 바른 사용(2)
현조(玄祖) 5대(五代) 5대조(五代祖) 1세손 1세, 1대
고조(高祖) 4대(四代) 4대조(四代祖) 2세손 2세, 2대
증조(曾祖) 3대(三代) 3대조(三代祖) 3세손 3세, 3대
할아버지(祖) 2대(二代) 2대조(二代祖) 4세손 4세, 4대
아버지(父) 1대(一代) 1대조(一代祖) 5세손 5세, 5대
본인(己) 1세손(一世孫) - 6세손 6세, 6대
아들(子) 2세손(二世孫) 1세손(一世孫) 7세손 7세, 7대
손자(孫) 3세손(三世孫) 2세손(二世孫) 8세손 8세, 8대
증손자(曾孫) 4세손(四世孫) 3세손(三世孫) 9세손 9세, 9대
현손자(玄孫) 5세손(五世孫) 4세손(四世孫) 10세손 10세, 10대

표에서의 의미는 단순하다. '세(世)'와 '대(代)'는 나를 포함하여 계산되고, '세손(世孫)'이나 '대조(代祖)' 처럼 '손(孫)'이나 '대(代)가 붙으면 나를 제외한다. 내가 감히 조상이 되거나 황당하게 나로부터 후손의 서열에 들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이 본인을 지칭: '○○金氏 6세(世)', '○○金氏 6대(代)'
*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호칭: '○○金氏 5세손(世孫)', '○○金氏 5대손(代孫)'
즉, 당신은 ○○金氏 6세(世)이군요. ○○金氏 6대(代)이군요.
저는 ○○金氏 5세손(世孫)입니다. ○○金氏 5대손(代孫)입니다.

위정(爲政) 24章 -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
의로운 일을 보고 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없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유묵이 나오게 된 고사성어이다.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제사 지내야 할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함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하지 않음은 용맹이 없는 것이다. * 諂: 아첨할 첨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For a man to sacrifice to a spirit which does not belong to him is flattery. "To see what is right and not to do it is want of courage."
*flattery: 아첨
[해설]
☞ 의로운 일을 보면 적극적인 행동으로..
한자 고사성어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의(義)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눈앞에서 보고도 이를 실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는 뜻.
제사는 자기 조상에게만 지내는 것이다. 남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조상은 후손의 윤기(倫氣:인륜으로 맺어진 기운)를 타고 내려오기 때문에 다른 후손이 제사를 지내게 되면 윤기가 달라서 조상이 내려오지를 못한다. 이는 자기 조상의 제사를 자기가 지내야 하는 이유다. 제사 지내야 할 귀신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 조상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남의 귀신에 제사하는 것은 결국 보라는 듯 하는 아첨과 같다는 뜻이다.
의로운 일을 보고 하지 않는 것에는 단순히 포기하는 행위 외에 말없는 침묵도 포함된다. 보았다는 것은 알았다는 것이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에는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마음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동양철학이 다소 소극적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도 하지만, 논어에서 보듯이 동양철학은 항상 실행력을 강조하는 그 어느 철학이나 사상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의 실천철학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義士)는 옥중에서 많은 유묵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가장 대표적인 유묵으로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 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논어(論語)》 〈憲問〉편에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완성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답하신 말씀 중에 나온다.
'今之成人者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금지성인자하필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언, 역가이위성인의.)
이(利)를 보고 의(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成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그래서 실천철학인 유학을 익힌 유학자로서 성인(聖人)이 아니라 성인(成人: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안 의사는 실제 행동으로 의로운 행위를 과감히 실천하신 것이다.
위정(爲政) 16章 - 공호이단,사해야이(攻乎異端,斯害也已)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study of strange doctrines is injurious indeed!"
*ijurious: 손상을 주는, 해로운, indeed: 정말로
[해설]
☞ 요상함에 빠지지 말고 정통함에 몰입하라.
정통 학문을 하지 않고 이단(異端)에 탐닉하여 빠져 들면 해로움만 있을 뿐이다. 이단이란 늘 재미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게 하는 매력이 있지만, 헤어나지 못하고 정열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단은 성인(聖人)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에 경계하여 빠져 들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결국에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攻(공)'은 전적으로 다루는 것을 말하는데, 돌이나 금속 등을 다루는 공인(工人)들처럼 한가지 연구에 빠져 드는 것을 뜻한다.
유가사상가들은 이단의 사례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고사를 대표로 든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14장에서 양주와 묵적의 사례를 소개하였는데, 양주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사상가로 자신의 판단을 중요시한 사람이고, 반대로 묵적(묵자라고도 불림)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여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함을 강조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맹자나 정자 등에게 비판을 받게 되는데, 양주가 자신만을 위하니 군주가 없는 것(無君)과 같고 묵적은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니 아버지가 없는 것(無父)과 같다는 것으로 도리에 어긋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유가사상에서는 사람간의 차이를 인정하는데, 상하간 계급적 개념의 차이가 아니라 좌우간 관계적 개념의 차이이다. 이는 사회생활이나 조직생활에서의 질서유지를 위한 필연적인 차이만을 두는 것으로써 개인만을 위한 사회와 조직이 아니라 모두가 관계하는 사회이고 조직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임금을 우리나라 임금과 똑 같이 대할 수 없고, 남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와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적 차이 개념이다. 즉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깝고 먼 차이를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가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계급적 봉건주의를 옹호한다는 식의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유가사상만큼 철저하게 인간성 중심의 보편적 평등을 위해 실천을 강조한 사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관계적 차이 개념에서 나온 군주에 대한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를 무시했다 하여 양주와 묵적이 호되게 비판받은 것인데, 인간사회의 보편적 질서유지를 위한 충효에 의해 세상이 다스려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과 이익에 의해 세상이 다스려지게 되어 그 폐해가 심각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학문으로 대성하는 성리학의 시대가 되면서 불교(佛敎)도 양주와 묵적 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주는 이단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 이는 물론 공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된 것이었는데, 일상생활에서 도(道)를 실천하는 유가사상가들에게는 불교의 출가(出家)나 해탈(解脫) 같은 세상을 등지는 듯한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자학의 대가 정자(程子) 같은 이는 불교를 음탕한 이야기나 미색처럼 멀리해야할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위정(爲政) 17章 -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녀지지호? 지지위지지, 불지위불지, 시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 由(유): 공자의 용맹한 제자. 성은 仲(중), 이름은 子路(자로)
誨: 가르칠 회, 女: 너 汝(여)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Yu, shall I teach you what knowledge is? When you know a thing, to hold that you know it; and when you do not know a thing, to allow that you do not know it;-this is knowledge."
[해설]
☞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모른다고 할 줄 아는 용기
공자의 제자 중에는 자로(子路)라고 하는 용맹한 사람이 있는데, 성격이 괄괄하고 지기 싫어하다보니 평소에 잘 모르는 것도 억지로 우겨서 안다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자로를 빗대어 가르침을 주는 대목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우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우긴 거짓은 나중에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알고 있는 부분까지 의심받아 자기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해서 신뢰를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남이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안다고 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쳐 주지 않으니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가 포기해버리는 셈이 된다. 결국 자신은 모르는 부분에 대해 계속 모르게 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자신에게 손해가 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아는 것에 대해서는 과대하게 포장하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티를 안 내려고 한다. 나이나 지위에 대한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른다고 하면 어떤 손해를 입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자기방어적 행동일까?
어쩌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지도 모른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며, 그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해야 알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가 생긴다. 당장에는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순간의 모면은 영원의 짐이 되지만, 순간의 용기는 영원의 힘이 된다. 진정으로 용기있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위정(爲政) 18章 - 다문궐의,다견궐태(多聞闕疑,多見闕殆)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자장학간록.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 즉과우; 다견궐태, 신항기여, 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녹재기중의.)
자장이 녹(祿)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많이 듣되 의심스러운 것을 빼고 나머지를 신중히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되 위태로운 것을 빼고 나머지를 신중히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이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 子張(자장): 공자의 제자, 성은 ?孫(전손), 이름은 師(사)
干(간): 구하다, 방패, 闕(궐): 빼다, 대궐, 尤(우): 허물, 잘못, 더욱
寡(과): 적다, 悔(회): 후회,과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sze-chang was learning with a view to official emolument. The Master said, "Hear much and put aside the points of which you stand in doubt, while you speak cautiously at the same time of the others:-then you will afford few occasions for blame. See much and put aside the things which seem perilous, while you are cautious at the same time in carrying the others into practice: then you will have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When one gives few occasions for blame in his words, and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in his conduct, he is in the way to get emolument."
* emolument: 보수(報酬), perilous: 아주 위험한, repentance: 회개, 후회
[해설]
☞ 신중하게 말하고,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라.
듣고(聞) 보고(見) 말하는(言) 것에 대한 교훈이다. 듣고 보는 것을 많이 한다는 것은 많이 배운다는 의미이고,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것을 빼고 제쳐놓는다는 것은 잘 가려낸다는 의미이며, 말과 행실을 삼가 한다는 것은 잘 지킨다는 의미이다. 즉 배움을 넓게 하되 잘 가려서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듣고 보는 것을 많이 하고 말을 적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듣고 보는 것을 많이 해야 한다. 많이 배우려는 태도와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며, 배움의 확장 속에서 확신이 서지 않거나 웬지 불편한 것들을 배제할 줄 아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의심스럽다(疑)는 것은 아직 자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위태롭다(殆)는 것은 불안전한 것을 말한다.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것들을 가려서 신중히 말하고 행동할 줄 알면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비난이나 허물이 야기되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로 인한 자책이나 후회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일부러 구하려 하지 않아도 녹봉(재물)은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들어와 유명한 격언이 하나 생겼는데, 그 출처가 《논어(論語)》의 본 장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공자(孔子)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후대 유학자인 순자(荀子)의 가르침으로 《순자(荀子)》편이 더 정확한 출처이다.
"I hear, and I forget. (들으면 잊어버린다)
I see, and I remember. (보면 기억한다)
I do, and I understand. (행동하면 이해한다)" - Confucius(공자:孔子)
《순자(荀子)》 제8(第八) 유효편(儒效篇),
不聞不若聞之, 聞之不若見之. 見之不若知之, 知之不若行之;學至于行之而止矣
(불문불약문지, 문지불약견지. 견지불약지지, 지지불약행지;학지우행지이지의)
(듣지 않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고, 듣는 것은 보는 것만 못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만 못하고, 아는 것은 행하는 것만 못하다.
배움은 행함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What I hear I forget, what I see I remember, what I do I understand."
- Xunzi, Confucian scholar (순자:荀子, 유학자)
순자의 가르침은 배움을 행동으로 옮기는 1차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좀 더 신중한 2차적인 실천까지 한발 더 나아가고 있어 깊이가 더 하다고 하겠다. 신중하게 말하고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위정(爲政) 19章 - 거직조제왕(擧直錯諸枉)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애공문왈: 하위즉민복? 공자대왈: 거직조제왕, 즉민복; 거왕조제직, 즉민불복.)
애공이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사람을 버려 두면 백성들이 복종하며, 굽은 사람을 들어 쓰고 정직한 사람을 버려 두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 哀公(애공): 노나라 군주, 錯: 버려둘 조, 어긋날 착, 枉: 굽을 왕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Duke Ai asked, saying, "What should be done in order to secure the submission of the people?" Confucius replied, "Advance the upright and set aside the crooked, then the people will submit. Advance the crooked and set aside the upright, then the people will not submit."
* submit: 굴복하다, submission(굴복), crook: 구부리다, 사기꾼, upright: 강직한
[해설]
☞ 인사(人事)는 만사(萬事) - 정직한 사람을 등용해야.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한다. 사람을 잘 쓰는 인사(人事)야 말로 모든 일의 성공여부를 가르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차대한 인사의 기본이자 핵심은 '공정한 인사'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공정함의 잣대는 무엇일까?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정직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다.
조직이든 국가이든 리더나 위정자(爲政者)가 팔로워(follower)나 지지자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직한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시키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팔로워(follower)나 지지자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하게 되면 지지자들이 따르지 않는다. 인사(人事)가 수긍되어야만 모두가 따른다는 의미인데, 한마디로 납득이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납득의 한가운데 '정직함'이 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정직한 사람을 쓰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버려 두어야 한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즉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 일부 그렇지 못한 사람 일부.. 라는 식의 어정쩡한 섞어찌개 같은 방법은 신뢰받지 못한다.
사람은 대체로 정직한 것을 좋아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싫어한다. 비록 자신이 정직할 처지가 못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마음속에 정직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민주정치를 하는 오늘날에도 지도계층이나 위정자들만은 정직해 주기를 요구하는 심리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정직한 사람을 정직하지 않다고 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정직하다고 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 역사에서는 항상 그런 사람들로 인해 혼란이나 변괴의 무리수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로 인해 귀중한 인명손실이나 발전 대신 퇴보의 일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리더나 위정자들은 항상 바른 도리를 펼치고 이치에 맞게 하여 그러한 잘못된 풍조가 유행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위정(爲政) 20章 - 장즉경,효자즉충(莊則敬,孝慈則忠)
季康子問: 使民敬? 忠以勸, 如之何?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擧善而敎不能則勸.
(계강자문: 사민경? 충이권, 여지하? 자왈: 임지이장즉경, 효자칙충, 거선이교불능칙권.)
계강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윗사람에게 공경하고 충성하게 하며 이것을 권면하게 하려는데,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 대하기를 장엄함으로써 하면 백성들이 공경하고, 효도하고 사랑하면 백성들이 충성하고, 잘하는 자를 들어 쓰고 잘못하는 자를 가르치면 권면될 것이라.
* 季康子(계강자): 노(魯)나라 대부 계손씨. 臨: 대할 임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Chi K'ang asked how to cause the people to reverence their ruler, to be faithful to him, and to go on to nerve themselves to virtue. The Master said, "Let him preside over them with gravity;-then they will reverence him. Let him be final and kind to all;-then they will be faithful to him. Let him advance the good and teach the incompetent;-then they will eagerly seek to be virtuous."
*preside: 주재하다, gravity: 엄숙함, reverence: 존경하다, incompetent: 무능한
[해설]
☞ 종 부릴 때도 상전 모시듯 한다.
우리속담에 '종 부릴 때도 상전 모시듯 한다'는 말이 있다. 종을 어떻게 잘 부릴까를 궁리하지말고 자신이 먼저 상전 모시듯 공손하게 대해야 종(僕)이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물며 종 부리는 데도 그래야 하는데 정사(政事)를 하는 데 있어서야 더 이상 말한들 무엇하겠는가.
위정자는, 장엄하게 행동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자식을 사랑하고 인물을 잘 골라 쓰고 부족한 사람의 능력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존경하고 잘 따르게 되며 사람들이 서로간에 선(善)한 행동을 권면(勸勉)하게 된다.
장엄(莊)하다는 것은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엄숙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위정자가 난잡하고 가벼이 행동하게 되면 존경받지 못하고 믿음이 가지 않을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되면 몸가짐부터 단정히 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여야 보는 사람이 우선 믿음이 간다. 그래서 구성원들이 신뢰하고 자발적으로 팔로워잉(following)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부모에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일반인들도 그러한 모습에 따라간다. 그런데 지도층에서 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자식을 잘 못 사랑하는 왜곡된 모습을 보이면,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부모자식간 바람직하지 않은 이기적인 풍조는 말할 것도 없다. 직장에서도 자신이 상사를 잘 모시고 부하를 사랑하면 부하들은 자신을 믿고 잘 따르게 된다.
또한, 사람을 등용하여 쓰는 데는 정직한 사람을 천거하는 것 외에 능력에 맞게 잘 하는 사람을 써야 한다. 능력이 모자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쓰는 것은 전체에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하는 사람은 버려야 하지만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교육하고 가르쳐서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위정자가 펼치는 정책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 자신이 먼저 해야 하는 일들이다. 백성들이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 이전에 자기자신의 행동이 선행해야 함을 깨닫지 못하는 위정자는 실패할 것이다.
정사는 기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위정자의 선행에 달려 있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정(爲政) 11章 -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잊지 않고 새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 溫: 따뜻할 온, 익힐 온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해설]
☞ 온고지신(溫故知新) vs.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것. 옛 학문을 연구하여 기본으로 삼고, 현재를 궁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지만 그 속 뜻을 깊이있게 음미해보자.
주석(注)에 보면 '온(溫)'을 '심역(尋譯)'이라 했는데, '심(尋)'은 '찾는다'는 의미이고 '역(譯)'은 '연역(演繹: 추론)'이라는 의미이다. 즉, '온고(溫故)'는 그냥 단순히 주어진 것만 소극적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서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옛 것(故)이라 함은 '구소문(舊所聞)'이라 하여 예전에 들은 것이고, 새 것(新)이라 함은 '금소득(今所得)'이라 하여 새로 터득한 것을 말한다.
논어 첫 장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온고(溫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옛 고전을 익히는 것은 오늘날 인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물론 단순히 옛 것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남에게 가르침을 펼치는 수준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고 오늘날의 학문이나 자기전공을 심도있게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문학 공부의 이유이기도 하리라.
'온고이지신'과 유사한 뜻으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는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의미로, 원래는 옛 것을 모범으로 삼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원본은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초정집서(楚亭集序)》라는 책에서 유래한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라도 그 존재가 한시적이 아니라면 구성원들은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자연스럽게 구분되어진다. 그리하여 두 세대간 끊임없는 갈등과 타협에 의해 조직은 유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로 고참으로 칭해지는 선배들로 이루어진 구세대와 신참으로 칭해지는 후배들로 이루어진 신세대의 조화가 관건인 것이다. 바로 그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말이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아닐까 한다. 구세대의 전통을 익히고 신세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구성원간의 관계형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직의 전통과 규칙을 따르되 새로운 변화를 알고 조직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새로운 것을 창출하되 전통이나 규칙에 위배되지 않게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도 일맥상통한다.
고참이자 선배의 대표격인 리더는 조직의 전통과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는 수용해주는 리더십(leadership)을 발휘하고 신참이자 후배격인 조직원들은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면서도 조직의 전통과 기준을 지켜나가는 팔로워십(followership)을 발휘한다면 그 조직은 조화롭게 발전해 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정(爲政) 12章 - 군자불기(君子不器)
子曰: 君子不器.(자왈: 군자불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accomplished scholar is not a utensil."
*utensil: (가정에서 사용하는) 도구/기구
[해설]
☞ 무한정한 쓰임새 있는 내면의 그릇을 키우자.
그릇(器)이라 함은 각각 그 용도에만 적합하게 만들어진 도구이므로 다양하게 통용될 수 없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표현된다. 밥을 담는 밥그릇, 국을 담는 국그릇, 찬을 담는 찬그릇,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 등등.. 그릇을 만들 때는 그 목적에 맞게 만들게 마련이다. 즉 그 쓰임(用)에 따라 모양(體)이 정해지거나 그 모양체에 따라 그 쓰임의 용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그릇(器)이 일정한 모양(體)을 갖추어 한정적인 재주와 기예(技藝)를 지니지만, 덕(德)을 쌓은 군자는 그 그릇이 일정하지 않아 재주와 기예가 한정적이지 않다. 군자는 단순한 도구인 그릇의 수준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 쓰임도 한가지 용도로써가 아니라 무한정(無限定)의 용도로 쓰이게 된다.
세상에는 평범하게 딱 자기 그릇만큼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그릇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역량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 흔히들 그릇의 크기에 비유하는 이유인데 특히 요즘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비유가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그러한 그릇의 크기에 따른 능력을 담보한 각개 역량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대단히 큰 무엇을 담을 수 있는 표면적인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어떠한 것도 포용할 수 있는 내면의 그릇 크기의 무한함으로 인하여 그 마음 씀씀이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자기분야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작업은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그 박수에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에 대한 찬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작업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극복하기 힘든 육체적 차이에 따른 것일 수도 있기에 아무나 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내면의 성숙을 통한 쓰임새가 무한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물론 마찬가지로 뼈를 깍는 고통보다 더한 마음의 수양이 필요한 것도 분명하기 때문에 그 아무나가 정말 아무나는 아니겠지만, 누구라도 환경과 여건이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위정(爲政) 13章 - 선행기언이후종지(先行其言而後從之)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而後從之.(자공문군자. 자왈: 선행기언이후종지.)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그 말할 것을 실행하고, 그 후에 말이 행동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sze-kung asked what constituted the superior man.
The Master said, "He acts before he speaks, and afterwards speaks according to his actions."
*constitute: ~이 되다, superior man: 군자
[해설]
☞ 말보다 실행, 실천력을 갖추자.
군자(君子)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으로 유명한 말이다. 군자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실행에 옮기며 이미 실행한 뒤에 말을 하는 존재이다. 공자는 늘 '말보다 행동'을 강조하면서 실행이 따르지 않는 말을 가장 경계하였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자공이 질문하는 의도를 파악하여 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자공은 젊은 제자인데 말을 잘하는 소위 달변가(達辯家)였다. 그런 달변가로서의 자공의 고민이, 말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군자가 되려면 말보다는 실행을 더 중요시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말과 행동에 대해 전해내려 오는 우리의 격언에도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말과 행동은 천지(天地)에서 보고 듣고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말을 아껴야 하며, 호언(豪言)하고 실행치 않으면 죄(罪)가 된다."
요즘은 말로 인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현대의 정치판에서는 선거 때가 되면 말들이 난무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공약(公約)'이라고 내세우는 말들이 후에 빈 말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아왔다. 군자로서의 정치가 아닌 소인배로서의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을 무수히 봐 온 것이다.
조직에서 리더는 자기가 한 말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부하들이 따르지 않는다. 그 말은 실천하는 리더가 되면 남들도 잘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바람직한 리더상이란 실행력을 갖춘 리더를 말하는 것이리라.

위정(爲政) 14章 -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불주(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자왈: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불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하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catholic and not partisan.
The mean man is partisan and not catholic."
*catholic: 보편성,포용성, partizan: 편파적인,당파적인, mean: 비열한, 상스러운
[해설]
☞ 치우치지 말고 두루 사랑하라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본문에서 '주(周)'는 '공(公)'으로 '보편(普遍)'을 뜻하고, '비(比)'는 '사(私)'로 '편당(偏黨)'을 뜻한다. 즉, 군자는 보편적인 사랑을 하지만 소인은 치우친 사랑을 한다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군자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소인은 자기무리의 이익에만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편당을 가르지 않고 두루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한 무리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세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로부터는 정치판의 당파주의에서 직장과 사회에서의 파벌 및 이익집단, 아래로부터는 학교나 아이들의 패거리문화에서 마을공동체의 님비(NIMBY) 현상까지 주로 자신들만의 이익을 우선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소인배들의 전형적인 행태(行態)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한마디로 '편당(偏黨)이 넘쳐 나는 세상'으로 되어 버린 듯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편당은 군자와 대비되는 소인의 본래 모습과는 양상이 조금 다른 느낌이다. 고전에서의 군자와 소인의 행동을 보면 늘 서로 상반되는 양태를 보이는 듯 하지만, 사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폭과 정도만 다를 뿐 둘 다 사람을 친(親)하게 여기려는 의도는 같았다. 다만 군자는 그 의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이 가도록 공공(公)의 이익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반면, 소인은 사사로이 자기(私)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게 다르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그래도 인간성(人間性)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가치판단의 중심에 서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고전 속의 소인과 달리, 오늘날의 편당은 사람이 가치판단의 중심이 아닌 집단의 목표나 사상과 이념 등이 사람 그 자체보다 우선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전 속에서의 소인배의 행동으로 인한 것보다 더 위태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군자는 둘째치고 소인의 인간성 배려 수준에도 못 미치는 '비(非)인간적', '몰(沒)개성적' 행동이 판치는 진짜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옛날 편당이 더 나았던 게 아니냐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나올 만하다. 비유하긴 뭣하지만 마치 예전의 맨주먹만을 사용한 인간적인 결투와 요즘의 떼거리간 무시무시한 연장을 동원한 집단난투극 같은 차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이기적인 '인간적 편당'의 수준을 벗어나 다분히 기계적인 '맹목적 편당'으로 변질되고 있는 느낌으로, 점점 소인배보다도 더 못한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우려일까.
사실 편당은 자기자신이 당당하지 못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시키기 보다는 무리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이 결국 자신을 소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세상이 되려면 끼리끼리 모이는 편당을 짓지 말고 사람 중심의 두루 하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한 사회나 조직의 수준은 편당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위정(爲政) 15章 -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CONFUCIAN ANALECTS - Confucius (Translated by James Legge)
The Master said, "Learning without thought is labor lost; thought without learning is perilous."
* labor lost: 헛수고 (lose one's lost: 헛수고하다), perilous: 아주 위험한
[해설]
☞ 배우면 생각하고, 생각하며 일하라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과 같다. 생각하는 그 자체는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상태와 동일한 것이다. 즉,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데 필요한 전초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심(私心)이 없다'는 것처럼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인데, 마음속에서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그로 인해 얻어지는 것도 없게 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우는 시간만 낭비하고 얻는 것이 없어 헛수고가 된다. 즉, 자기 것으로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공부하는 자세를 일러주고 있는데, 그러한 태도에서의 생각은 자기만의 행위이므로 결국 공부는 순전히 자기자신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무엇을 배우면 생각하여 되새기고 정리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헛수고가 아니라 위태로워 진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반드시 해야 유익할 것이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거나 할 것인데, 어떻게 할 지에 대하여 배워 익힘이 없다면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되어 유익하지 않거나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으므로 위태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이는 생각없이 배우기만 하는 헛된 노력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이다. 공자(孔子)는 일관되게 '실행(實行)'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행동대원 같은 실행을 중시한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의 생각이 앞서는 실행을 중시하였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와 같이 배움에는 익히는 행위가 따라야 하는데, 익히는 행동에는 먼저 생각하는 단계가 전제로 깔려 있다. 배웠으니 어떻게 익혀야 할 지를 생각하는 전제인 것이다.
우리는 평소 '생각없이 일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처럼 완전 헛수고는 아닐지라도 자신에게 얻어지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면 생각하고, 생각하며 일하자' ※ 중국 송(宋)나라의 정자(程子)는 《중용(中庸)》 20章을 인용하여, 학문에 5가지가 있는데 '박학(博學: 넓은 학식)', '심문(審問: 상세한 질문)', '신사(愼思: 신중하고 깊은 생각)', '명변(明辨: 명확하게 말함)', '독행(篤行: 돈독한 행실)' 등으로 한가지라도 부족하면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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